일본 독점자본의 조선농촌지배와 관련하여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농촌을 쌀을 중심으로 하는 식량과 면화, 고치등의 공업원료 공급기자로 구조화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조선 농촌 지배는 일본 독점자본이 초과이윤을 획득하기 위하여 조선농촌에 침투, 재편성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역사적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자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틀 속에서 독점자본과 지주, 그리고 직접경작농민이라는 3자의 관계가 하나의 연결된 고리로서 통일적으로 파악되어져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이 글은 이들 3자의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양잠경영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양잠농민의 고치생산과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그 경영형태별 생산관계에서 나타난 농민과 제사독점자본 그리고 지주층과의 사회적 관계의제 변동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제사독점자본의 지배」라는 측면에서 양잠농민의 사회적 존재형태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점자본주의로 구조적 재편성을 단행한 일본은 만성적인 농업공황에 직면하였다. 특히 주요 수출산업이었던 제사업은 가격폭락과 수출 감퇴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일본은 급격히 양잠생산량이 떨어졌으며 제사업 역시도 생산제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미 독점적 위치를 확립한 일본 제사자본은 여전히 많은 원료고치를 요구하였고, 이 요구는 식민정책과 직접 결합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자본을 투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활발한 투자를 시작한 일본 제사독점자본의 본격적인 진출을 보장해 주어야했다. 즉 적극적인 원료확보대책을 수립하여야 했다. 「고치 백 만석 증수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제의 양잠업 정책의 제1목표는 생사수출을 위한 보다 많은 원료고치의 확보였다. 그러나 극도의 노동집약도를 요구하는 양잠경영은 무엇보다도 농민의 종래 노동력 배분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양잠의 사육은 봄고치가 5~6월, 가을고치가 9월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는 다른 밭작물의 기경제초의 시기였다. 농민이 입장에서 보면 새로이 부과된 과중한 부담이었다. 따라서 선뜻 경영에의 참가를 꺼려했을 것이다. 뽕나무는 땔감으로, 잠종은 가축의 먹이로 쓰는 등 양잠경영에 매우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와 같이 양잠경영에 소극적인 농민층을 강제로 동원시키기 위해서는 식민지 잠업정책 보급의 매개자 역할을 할 고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대지주나 마름, 또는 면장, 군수를 대상으로 하여 양잠 장려를 선전하였다.

일제는 이들 식민지 권력을 매개로 이들의 지배하에 있던 농민에게 뽕나무 재배와 양잠을 강제했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반강제적인 양잠장려정책으로 1910년 이후 고치생산액과 양잠농가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양잠농가호수의 증가는 곧 주요한 담당계층의 확대를 필요로 하였다.

1920년대 중반기를 전후로 하여 자본력 있는 중농이상 계층에서 중농 이하까지 담당계층의 범위가 확대되었고, 다시 1930년대 초반의 농업대공황 이후에는 극빈 소작농에게로까지 확대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서 총독부는 다양한 경영형태를 장려하였다. 즉 자작농가 이상의 중등 상층으로서 토지 및 노동력의 충분한 여유가 있는 농가에서는 순상전 조성을 장려하였고, 노동력의 여유는 있으나 토지가 없는 자작이나 소작농에게는 간작상전을 정려하였다.

또한 토지와 노력의 여유가 전혀 없는 영세소작농에게는 양잠소작 ․ 상전소작을 장려하였다. 이는 지주나 독점 제사업자로 하여 집단적으로 순상전을 경영하게 하는 것이다.

아로써 볼 때 1920년대 중반과 1930년 이후의 각각 두 시기에 걸쳐 일제는 야잠장려방침의 변경, 확대를 통하여 조선 전체 농가를 상대로 양잠농민으로 재편코자 하였던 것이다.

일제하 양잠경영은 일반적으로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경영보다는 영세한 경영이었다. 양잠농민의 경영형태는 크게 자작양잠과 소작양잠의 형태로 구분된다.

우선 자작양잠의 경우, 「자작농가의 자작양잠」과「소작농의 상전소작 자작양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작양잠농가의 대부분은 지주로부터 밭을 빌려 뽕나무를 심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이 양잠경영을 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주의 찬성이 필요했다. 실제로 일반적인 소작관행상 소작인은 지주의 허락 없이 임의로 뽕나무를 심을 수 없었다. 지주나 마름은 소작지에 뽕나무 같은 영년식물을 심을 경우 그들의 중요한 무기인 소작권 박탈이 곤란해지기에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총독부는 이러한 완강한 지주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이는 당시의「상전소작계약서」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뽕밭소작 계약형식은 문서계약이었다.

해당 토지의 소재지, 지번, 지목, 면적 등에 대해서 상세히 기재하여 계약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이 경우에 지주의 무조건 승낙을 성문화시켰다. 이 같은 조항은 총독부의 제사독점자본가 중심의 농정에 지주가 강한 제약을 당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작료는 주로 정조로 하여서 벼나 현금의 형태로 지불하였다. 이렇듯 총독부는 지주 지배하에 있던 소작농에게까지 양잠을 보급시키기 위해서 지주에게 강압적 협조를 요구했다. 그 대신 지주에게도 반대급부로서 소작료 수입의 안정적 확보를 보장해 주는 조항을 성문화시켰다.

일제는 지주층의 이익 역시도 일제의 제사독점자본의 이윤이 침해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보호해 주었다.

결국 일제가 소작농 보호의 목적에서 실시했던「뽕밭소작 자작양잠」의 형태가 실제로는 이 시기 양잠장려의 사회적 지렛대로서 지주층을 동원하여 이들의 지배역량으로 소작농민을 장악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두 번째, 양잠소작경영의 형태는「개인지주의 양잠소작」과「제사독점자본의 양잠소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잠소작이 본격적으로 행해진 시기는 1930년 대공황 이후로 보여 진다. 이 경영형태는 주로 땅을 소유하지 못한 농가나 자금의 여유가 없는 농가나 자금의 여유가 없는 농가에서 행해졌다. 결국 양잠소작제도란 1930년 이후 계속하여 고치가격의 폭락으로 인해 경영을 포기하거나 축소하려는 자작양잠농가가 속출하는 상황 속에서 양잠을 경영할 여유가 없는 소작농마저 포섭하여서 제사 독점자본의 초과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제도였다.

 

개인지주의 양잠소작 경영은 이들 개별지주가 일제의 양잠장려정책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지주나 마름 중에서 직접 자기 재배 하에 있는 소작인들을 양잠경영에 동원시키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답작 소작을 통해 미곡상품화를 꾀하였으며 밭에서는 양잠소작을 통해 고치상품화를 꾀하였다. 다른 밭작물 보다 환금성이 높은 고치를 소작료로 받을 수 있었기에 유리한 상품생산 경영을 할 수 있었다.

개인지주의 양잠소작계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약형식은 대부분이 구두계약이었고 드물게 증서를 교환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개인지주의 양잠소작 내용은 지주측의 지배력이 매우 강하게 작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주측은 소작인에게 생산성이 좋은 순상전을 장려하였다. 또한 묘목과 잠종은 대부분이 지주가 부담하였으며 그 품종은 지주가 결정하였다. 소작인은 양잠경영에 필요한 노력과 잠실 정도만을 부담하였다. 소작농은 이 시기 지주가 고용한 양잠교사의 순회 지도를 받아 경영을 하였다. 이때 양잠교사의 경비는 군농회나 면에서 보조를 받았다. 그리고 소작기간은 계약으로는 뽕나무의 성질상 10~15개년 정도의 장기간 소작권을 얻을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양잠기마다 새로이 갱신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주측이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소작료는 대체로 뽕나무 심은 지 3년 후부터 양잠기 등급별 총 고치생산액의 절반이었다.

이와 같이 개인지주들은 자기 지배하에 있는 소작농들을 양잠소작농으로 재편시키면서 생산과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지주의 생산과정에 대한 규제와 간섭은 소작료로서 들어오는 고치의 상품화에 대한 그들의 강한 욕구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소작농은 부업양잠경영에까지도 경영의 자립성을 점차 상실하게 되면서 단순한 노동자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지주에 의해 강제로 양잠소작농이 된 농민은 고치 생산량의 절반을 소작료로서 납부하고 그들에게도 절반의 고치가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절반 소득분의 상품화 과정에서 제사독점자본가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하였다. 지주 역시도 양잠소작농을 지배하면서 고치를 상품화시켰으니 그 과정에서 제사자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또한 제사업자가 직접 경영하는 양잠소작은 1930년 이후 전국 각도에서 실시되었다.

제사업자가 지주로부터 뽕밭으로 사용할 토지를 빌릴 경우, 소작기간은 10개년으로 하였다. 이때 소작료는 정조로 하여 매년 11월초 부근 시장에서의 벼나 대두의 가격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뽕밭예정지 지주는 제사가와 정식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군수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여야 했다. 그 내용은 군수가 추천한 제사업자와 반드시 임대차 계약을 맺을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일제 조선 식민지 지배의 말단에 위치해 있는 군수를 동원하여 지주를 정책적으로 독점자본에 예속시켰던 것이다.

1930년대 들어서 일제는 지주를 통한 소작농의 통제가 아니라 지주 역시도 자본에 예속시키면서 독점자본을 통한 소작농을 직접 통제하였다.

제사업자와 양잠농가가 맺은 소작계약의 내용은 철저히 양세소작농의 복종과 성실함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소작계약의 형식은 연대 소작계약이었다. 각 계약자에게 규정된 사항의 이행을 철저히 의무화시켰으며 양잠소작농으로 재편된 자들을 모두 양잠조합에 가입시켜서 제사독점가의 요구에 순종토록 강요하였다.

 

경영조건으로서는, 제사업자측이 뽕밭용지(내지는 차지료), 묘목, 비료, 잠종대금 등을 부담하고, 양잠농민이 노동력, 퇴비 등을 부담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제사자본가는 강력한 소작농 지배를 토대로 하여 식민지적 초과이윤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결국 제사독점자본은 양잠소작농을 생산과정에서부터 분배, 유통과정까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고, 양잠소작농은 단지 농업노동자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또한 독점자본은 소작농 뿐 만 아니라 지주까지도 자신의 지배하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즉 1930년대에 들어서 고치생산량의 증가는 지주를 배제시키는 한편 제사독점자본이 직접 지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생산과정까지를 장악하게 된 독점제사가는 고치의 안전한 확보를 목적으로 한 공동 판매제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양잠농민을 전일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양잠농민의 자유스런 판매를 금지하면서 공판을 강제하였다. 공판되어진 고치는 대부분이 몇 개의 일본인 회사에 독점되어 농락당하는 것이었다.

 

결국 공판제도라는 것은 독점제사업자로 하여금 영세한 생산자를 상대로 유통과정을 완전 장악하여 부당한 식민지 이윤을 착취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적 장치였다. 즉 고치의 상품화과정은 제도적으로 독점제사자본이 양잠농민을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이같이 제사 독점자본의 강력한 지배 하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허덕이던 양잠농민은 제사 독점자본, 나아가 수탈을 위한 농업정책을 수행한 식민지통치권력을 상대로 자신들의 생존권 확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운동은 1928년의 신간회, 단천지회의 활동과 1930년 정평농민조합의 활동에서 보여 지듯이 민족해방운동의 차원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일제하 양잠농민은 지주 뿐 만 아니라 1930년대 이후에는 제사 독점자본의 강력한 직접지배를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제사 독점자본이 식민지 초과이윤을 실현시켜나가는 과정이었으며 이는 동시에 제사독점자본이 지주를 종속시키고 농민을 직접 지배하여 조선 농촌사회를 일원적으로 장악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는 바로 대공황 후에 일제가 점차  지주층을 종래의 동반자적 지위에서 소외시켜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 혜 수(대학원 사학과 89년 졸업)



논문평


양잠소작농의 성격과 특질 잘 지적해

최근 년 간, 한국 근현대의 약사를 재조명하여 우리들의 오늘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연구 작업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있다.

이 논고는 필자의 석서학위 논문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으로, 일제시기 조선 양잠농민에 초점을 맞추어 총독부 권력의 비호를 받아 식민지 초과이윤을 획득하고 있던 일본「제사독점자본」및 지주층과의 모순․대립관계의 분석을 통해서 그 사회적 존재형태를 고찰한 것이다.

특히 양잠소작농의 생산과정에서 지주의 지배를 받으면서 농업노동자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점과 또 다시 지주와 함께 공판제도 등의 유통과정을 통해 또는 직접적으로 일본제사독점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구조적 특질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제사독전자본과 나아가 수탈을 위한 잠업정책을 수행한 식민지 통치 권력에 대한 양잠 농민들의 생존권투쟁이 결국 민족해방운동의 차원으로 발전되어 나갔음을 논증한 것이다.

지면관계로 논점정리에 있어 다소 소루한 점도 없지 않으나 이 분야의 일정한 수준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김 경 태(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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