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대 후반 문학상황

 『…가령 이번 태평양전쟁에 만일 일본이 지지 않고 승리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본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살아가려고 생각했느냐고…이 순간에 「내」마음속 어느 한 귀퉁이에 강잉히 숨어 있는 생명욕이 승리한 일본과 타협하고 싶지는 않았던가?…

「나」만은 이것을 덮어두고 넘어갈 수 없는 이것이 자기비판의 양심이 아닌가하고 생각 합니다』

 이는 해방 직후의 한 문학인이 자기비판의 석상에서 한 말이다. 여기서는 그가 실지로 친일활동을 하였었다든가, 아니면 정말 일본이 승리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가정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식민지 시대 대표적인 문학인의 한 사람이 1930년대 말에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라도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천황의 대어심(大御心)은 생성발전만물화육(生成發展萬物化育)의 우주섭리의 현현이다』라고 주장하고 (대정익찬회발표, 「대동아공영전의 기본이념」)동양에서 영미귀축을 몰아내어 동양에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전을 성립시켜 동아신질서를 건설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제국주의 침략으로 몰고간 1930년대 말의 상황은 어느 한 편에 시기를 강요받고, 그렇지 않으면 문학인으로 존립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외적 폭압의 힘에 대해 한 개인이 직접적으로 거부하면 저항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 힘에 자신의 존재를 함께 할 수 도 없는 상태,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자신의 힘의 근원을 발견하지 못하고 개인으로서 현실의 힘에 부딪쳐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상태, 그러한 상황에서 한 개인이 선택한 길은 무엇인가, 현실의 발견을 믿고 또 그를 위해 노력했던 지식인들에게 닥쳤던 상태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많은 문학인들이 이에 동요했고 한편으로는 붓을 꺾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의 안녕을 보지하기 위해 믿지 않는 것을 적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외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최소한의 양심」을 그러안고 예술이라는 신화 속으로, 논리의 숲으로 숨기도 하였으며, 「자기현존재에의 충실함」을 외치며 결국에는 현실에 타협하고 말기도 하였다. 하지만「자신의 존재」의 비밀을 소시민적 지식은 속에서 찾고서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다시 일어서고자 애태우거나, 때로 리얼리즘의 원칙을 저버린 위험에까지 이를 정도로 상징화된 형식으로 새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열망」을 드러내고자 한 문학인들로 존재하였다.

그러고 이러한 상황은 해방이후 현대 한국문학사에 또다시 재현되었고 그들을 단절된 전통 속에서 선인의 실천을 전혀 자신의 것으로 하지 못한 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여 피어린 발자국을 남기며 어렵사리 나아왔던 것이다. 물론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또 그때의 과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고 있을 때, 당대인들이 자신의 시대가 해결해야만 했던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하였는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하였으며 또한 그 실패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을 곧바로 우리의 과제를 해결하는 힘으로 되는 것이며 그러함으로써 은폐되어 있던 과거가 비로소 살아있는 전통이 되는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작가와 작품세계

1931년 만주사변으로 시작되어 1937년 중일전쟁, 1914년 대동아전쟁, 1945년 패망으로 종언되는 소위 15년 전쟁기간은 1928․9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발 제국주의 일본이 제국주의의 내적위기를 폭력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시기였다. 점차 파쇼화, 반동화해나간 일본 제국주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라는 전체주의 세계관을 내세워 제반 진보적 운동을 탄압하였고 문학운동에서는 1935년 카프의 해산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930년대 후반기(카프의 해산이 그 분기점이 된다)의 문학의 양상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카프에 속했던 문학인들의 현실에 대한 대응의 방식이다. 카프는 단지 하나의 단체로서가 아니라 식민지시대 가장 올바른 문학의 방향을 담보하고 있었던 문학운동조직으로서 존재했었고, 따라서 그에 속했던 문학인들의 현실 대응방식의 방향은 곧바로 1930년대 후반기 문학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응방식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며 또 가장 치열했던 것은 동요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점검이었다.

 

그 대표적인 문학인이 김남천이다. 1935년 해산직후 현실적인 창작방법론의 모색으로 내세웠던 자기고발의 문학론에서부터 시작된 감남천의 자기비판은 1937년「처를 때리고」,「춤추는 남편」, 「요지경」, 「녹성당」등의 일련의 소설 속에서 구체화된다. 과거의 사회주의자였던 소시민 출신의 지식인, 투옥, 출옥후의 무기력, 동요, 김남천의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처절하게 비판되며, 그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었고, 재건을 위한 안타까운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몸짓은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결과하고 만다.

 

분열되지 않은 자아를 소년의 눈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은 작가로서 지니고 있는 균형감각에 의한 것이겠지만 그러한 소년의 눈을 통해서 그려질 수 있는 것은 현실에 대한 즉자적 반항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고 주관적 노력뿐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실패는 김남천으로 하여금 새로운 유형의 인간은 찾아나가려 하였고 그러한 인간형을 「사랑의 수족관」에서 발견한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광호라는 인물은 최소한의 양심만을 지녔을 뿐인 직업인이었고 그러한 직업인의 삶을 통한 재건은 자신의 직업에의 매몰, 그리하여 결국에 가서는 현실에 대한 총체성의 상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것은 「낭비」, 「경영」, 「맥」의 삼부작을 통해 나타나는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지향일 뿐이었다.

한 설야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김남천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한설야 또한 김남천과 동일한 과제,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검토에 맞닥뜨리는데, 그 해결의 방식은 김남천과는 다른 방향이었으며, 어떤 점에서는 가장 의미 있는 모색이었다. 「황혼」에서 준식과 여순을 통해 무위한 지식인 경재의 몰락을 그려냈던 한설야는 재생의 가능성을 새로운 생활 곧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에서 찾았으며, 「후미끼리」와「임금」을 통해 그 가능성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 또한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바닥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할 뿐, 그리하여 가능성의 일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 뿐 모든 것을 담보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설야의 경우 이것을 그의 주관적인 열망, 의지 속에서 찾으려 하였고 그것은 「청춘기」의 결말과 같은 현실 왜곡의 형태, 또는「마음의 향촌」의 채색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주인공의 도덕적 순결성에 맞물리는 것이었다.

 이기영에게 있어서도 1930년 말1940년대 초의 모색은 동일한 결과로 나타났다.

「신개지」에서 「고향」을 잇는 소설을 쓰고자 노력했으나 그것은「고향」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고 결국에는 「고물철학」과 같은 개인의 성실성의 차원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비평의 영역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1933․4년에 시작되어 1937․8년에까지 이어진「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쟁은 리얼리즘 논의에서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지만 작가의 실천과 매개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 리얼리즘 논의에서 임화의 뛰어난 성과도 1930년대 말 「생활의 발견」에서는 객관주의의 편향으로 귀결되고 말았고, 감남천의 일련의 모색 또한 객관주의적 편향과, 소설이라는 장르에 기댄 유토피아적 열망을 귀결되고 말았다.

 

이상 몇 작가와 비평가를 통해 간략하게나마 그들의 모색의 가능성과 한계를 살펴보았다. 동요하는 자기 자신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것 중의 하나일 수 있었다. 1930년대 문학운동의 실패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점검해 나가는 길의 하나가 바로 그 주체적 역량에 대한 점검일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실패로 귀결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을 단지 광폭해 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압력이라는 상황의 논리로만 해석하거나 혹은 지식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돌리거나 하는 것은 일면적인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긴 하지만 올바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들의 주관적 열망이 현실과 매개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 검증받지 못했다는 점, 즉 다시 말해서 주관적인 것으로서의 경향성에 머무르고 현실적인 당파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 그 한계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1935년을 정점으로 점차 쇠퇴해가는 노․농운동의 흐름 속에서 어쩌면 대중보다 먼저 좌절했을지도 모를 문학인은 1928․9년에 제출된 바 있는 「대중의 투쟁 한가운데 서라」는 요구를 1930년대 후반 다시 요청받았음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음이 그들의 한계였고, 그들의 주관적 열망은 현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으로 밖에 나타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비판적 리얼리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이상 1930년대 후반의 문학적 상황을 카프에 소속했던 문학인들의 현실 대응방식을 통해서 점검해 보았고 그 한계를 당파성의 부재에서 찾아보았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을「비판적 리얼리즘」이라 이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의 지적이 결코 그들의 모든 노력을 무화 시키는 것이 아님을 물론이다. 오히려 그들의 노력과 그 결과는 당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으며 또한 값진 것임이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한설야의 「황혼」, 「홍수」, 「산촌」, 「부역」, 「삼부작」, 이기명의 「신개지」, 김남천의 「대하」와 「경영」, 「맥」등은 문학사에 남을만한 소설적 성과인 것이다. 비록 현실의 본질적 흐름에 매개되지 못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높이로 고양되지 못한 것이 한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력들은 현실의 본질의 한 측면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소시민적 세계를 세계의 전체로 환원하고 자신의 불인정성을 세계의 그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소설화한 일련의 작가들, 또는 야담의 세계로 대중을 이끌어감으로써 현실의 모순에서 눈을 돌리게끔 만든 작가들, 나아가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이 모든 것일 뿐 아니라 가장 올바른 것이며 오직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던 작가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지금 우리의 문학 현실은 과연 어떠할까. 이제 우리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미 길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채호석(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3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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