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요구하는 대학언론 사명을 다할 터
역사가 요구하는 대학언론 사명을 다할 터
  • 장양선
  • 승인 198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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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학보 변천사

 1954년 창간 이래 이화역사의 커다란 줄기속에서 학내의 건전한 여론조성과 학구풍토조성이라는 올바른 대학문화창달을 위해 이대학보는 부단한 변화의 몸짓을 계속하였다.
 이에 900호를 맞는 오늘, 그간 이대학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봄으로써, 이제 새롭게 요구되는 언론의 사명들을 충실히 수행하며 보다 나은 이대학보의 미래를 기대하면서 본 기획을 싣는다.


 학교 홍보지 성격이 컸던 50년대
 본지는 1954년 2월 12일 타블로이드판의 모습으로 창간을 맞는다. 이 때 학생기자는 영문과, 국문과 재학생 중 추천에 의해 선발되었고, 기사를 계획하고 편집하는 결정권은 모두 주간교수가 맡아보았다. 그러다가 55년부터 공개경쟁을 통해 학생기자를 선발하였고, 59년 이후에는 교수편집위원제를 폐지하게 된다.
 이 시기 신문의 전반적인 모습은 학생신문이라기 보다는 학교 홍보지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또한 본교가 기독교 학교라는 특수성이 신문지상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모습도 보인다.
 56호(1959년 11월 15일자) 신문을 살펴보면 1면 톱기사가「거듭나는 믿음과 새소망-은혜가운데 끝마친 대부흥회」로 2,3면에 걸쳐 기독교 윤리와 부흥회에 관한 자세한 기획기사들이 실리기도 했다.
 또한「메이퀸의 근황」,「결혼」,「이대생과 옷차림」등 대학신문의 역할과는 동떨어진 내용의 기사들도 눈에 뜨인다.
 이렇듯 학술논문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흥미 위주의 여성잡지를 연상케하는 기획물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속에서 대학의 임무라 할 수 있는 사회상의 반영, 즉 시사적이고도 예리한 판단을 요하는 정치적인 내용의 글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은 또한 학보사의 의견을 대표하는 사설을 통해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 당시의 사설은 이름만 사설일 뿐 개인의 이름과 의견을 담은, 극히 의례적, 추상적인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세례의 의미」,「문화제의 보존」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가운데에서도 진정한 대학언론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의 시초는 보이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58년「신춘학생논문현상모집」같은 행사들이다.


 4·19 이후와 그리고 어두웠던 유신치하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4·19 혁명은 대학사회와 대학신문에 있어서도 그전과는 다른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이화사에 있어 특히 4·19 불참은 이후 자성과 질책 속에서 이화가 다시 태어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본지도 이러한 흐름속에서 63호(60년 5월 9일자)를 통해 4·19 불참에 대한 뼈아픈 자성과 함께 새롭게 태어날 것임을 약속하며 「4·19정신을 계승하자」는 기획기사를 2면에 걸쳐 싣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격동의 사회 움직임속에서 학보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 이화 내 여론을 반영하기 위한 설문조사가 본지를 통해 처음 실시되었다. 설문조사 결과,「학보가 학교측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많은 학생들의 아픈 질책이 쏟아지기도 했다.
 또한 학생들의 참여를 늘리기 위해서는 학술면 등을 개방해야 하며 시사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오게 된다. 당시의 학술논문은 대부분 교수들의 전문적인 학술발표장의 성격을 띠었고, 학생참여란으로 수필, 시 등을 담은 문화면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60년 4·19 혁명 이후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자율적인「중앙학생회」가 결성되면서 본사를 학생회의 합의체로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한다.
 그러나 60년대 초 계속된 여론조사의 결과, 학보는 학생회와 학교의 중립적 위치에서만이 냉정한 비판과 올바른 대변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나타나 학생회와는 별개의 독립적 기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4·19 불참 이후 누구보다 많은 각성을 했던 이화는 64년, 65년의 굴욕적인 한일외교수립반대투쟁 등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학보에 있어서도 그전 시기보다 한층 바른 언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여, 이후 대학언론이 갖는 비판적·사회고발적 성격의 맹아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는 높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사회현상에 대해 원론적 고찰이 많고, 학교에 관한 보도기사에도 우회적 표현 등을 사용, 학교당국의 입장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거기다 60년 말에 가면서 점차 대학내의 감상주의적 분위기에 편승하게 된다. 4·19혁명의 불길을 잠재워 버린 5·16 쿠데타 이후, 처음 나온 98호(61년 5월 22일자)에서는 5·16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많은 기획들이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은「군사혁명은 후진국에 있어 효과적인 사회개조방법이다」라는 식의 것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미묘한 사건에 관하여 본지 나름의 인식의 틀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보이지만, 그 내용은 반공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친정권적 사상을 담고 있어 과연 그 당시 학내여론을 올바로 반영하였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한편 4·19 이후 점차 눈을 뜨기 시작한 사회의식들이 60년대 중반으로 갈수록 점차 침체국면을 맞게 된다.
 그래서 100호 지령에서「학보는 신문과는 다르며 어디까지나 학생생활을 토대로 한 학구적인 것과 학교내에서 화친할 기회를 주는 것이 이대학보가 취할 태도」라고 규정하며 대학의 특히, 언론의 비판적 기능을 무시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를 두고 당시 한 재학생은 투고를 통해「여자고등학교신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어쨌든 이 시기 학보의 시각은 점차 학내로 쏠리게 된다. 그래서 교통안내 캠페인을 비롯 각종 학교내의 기사들이 기획되어 실렸다.
 거기다「메이퀸 선발」이 항상 1면 머릿기사를 채우고「칵테일 사용법」,「간편한 생활복 안내」등의 기사를 통해 상류소비문화를 조장하는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속에서 대학언론의 사명인 건전한 여론조성과 참문화 계승발전을 위한 시도가 다양하게 전개되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62년도에 실시된「캠퍼스 이름짓기」캠페인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휴웃길」,「헬렌잔디」 등은 이를 통해 나온 이름들이다. 당시 이러한 행사들은 애교심고취에 공헌을 하게 된다.
 또한 계속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올바른 대학언론의 상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특히, 실험정신에 입각하여 한글전용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1968년도에 이르러「대학의 전통수립과 계승을 위한 시리즈」를 통해 학생운동에 대한 고찰이 나오게 된다. 이는 이전의 학보들과 비교해볼 때 상당히 발전된 양상을 보이는 것이었다.
 71년의 위수령발동과 72년의 급작스러운 유신선포 후, 대학은 연일 계속되는 시위속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이러한 속에서 71~74년에 걸쳐 대학신문들은 학교소식지적 성격에서 벗어나 올바른 대학언론의 모습을 위해, 편집권 독립과 학생기자의 권한 확대 등의 요구 속에서 단결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전국대학신문 기자간의 정보교환 및 대학신문의 독립성·자율성 등을 논의하며 암울한 유신하의 언론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전개된다. 그것은 71년 5월「대학언론인협회」발족을 통해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73년 유신독재의 어둡고 억압적인 상황속에서「배포금지」나「검열」등의 문제가 학외로부터 더욱 가중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학보내에서 현실문제에 관한 언론의 날카로운 비판의 역할이 잘 수행되지 못하고 움츠러든다. 단적인 예로 475호(72년 12월 11일자) 사설「전환기에 임하는 자세」속에서는 당시의 사태들이 역사적 귀착점이며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 협조하는 지성이 요구된다고까지 평하고 있다.
 한편 정치적 암흑기 속에서 75년의「민주풍토조성을 위한 지상캠페인」이나「이화인 진단백서」등을 통해 이화인의 정서에 부응하고 학내발전 도모를 위한 기획물을 제작함으로써, 난관들을 극복해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여성의 인권문제나 소외계층들의 문제를 점검함으로써, 대학인의 사회참여 의식을 고취하고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기획물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 예를 들어 Y·H사건이나 민청학련사건 등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였다.


 80년, 검열때문에 흰 여백 그대로 발행하기도
 80년의 봄을 맞은 시기의 본지는 잠시 자율화된 학원풍토속에서 그간의 침체를 회복, 활발한 활동을 위해「70년대 학생운동정리」등을 게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로운 상황은 다시 광주항쟁과 쿠데타로 인한 신군부세력의 집권을 고비로 급격히 찬서리를 맞게 된다.
「민주화위해 토론하라! 투쟁하라! 실천하라!」로 시작되는 668호(80년 5월 12일자)는 격동하는 80년의 역사흐름 속에서 이화인이 의연히 대처하며 현 모순을 떨쳐나갈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많은 기사와 사진 등이 외부의 철저한 검열 속에서 전면 혹은 부분적으로 삭제되어 흰 여백 그대로 이화인에게 배포되는 사태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센 탄압속에서도 점차 민주화 요구와 대학 자율을 중심으로 이를 수용·배출할만한 매체로의 전환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780호(84년 10월 29일자)에는「학생운동 사적조명을 통해」라는 논문이 게재되고 르뽀의 형식을 통해 광주항쟁을 조명하였다. 또한 문화면에서도 기존의 일상적·서정적 성격에서 탈피,「현단계 문화운동의 점검과 전망」시리즈물을 등장시켜 실천적 모습으로서의 문화활동을 모색한다.
 한편 86년, 89년에는 학내외적 영향력배제를 통해 대학언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편집자율과 사전검열철폐」를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이대학보는 900호에 이르기까지 이화인과 함께 성장·발전해오면서 많은 한계와 오류에 부딪치기도 하고 때론 정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을 통해 이화인이 주인되는 신문, 민중과 함께 하는 신문이 되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앞으로 이대학보는 새롭게 요구되는 대학언론의 사명을 위하여 매체혁신작업 등의 노력으로 부끄럽지 않은 참언론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