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번이라도 민중의 삶 생각하기를…"
"하루 한번이라도 민중의 삶 생각하기를…"
  • 이근영
  • 승인 198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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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의 작가 홍희담씨를 만나본다

『학교다닐 때 글쓰는 그룹이 몇 명 있었어요. 같이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난 문리대「녹원」지에 한 번나왔는데 대학시절 합해서 한세 작품 정도 썼어요. 졸업 후 별로 쓰고 싶지 않다가 광주를 겪고…』남녁땅 광주에서 만난 홍희담 선배의 대학시절 문학 편력이다.

 강렬한 눈빛과 작은 몸집의 그는 이미 고2, 중3 두 아이 뒷바라지에 여념없는 45세의 중년. 64학번 대학시절을 더듬어 보는 게 좀 생소하다는 표정이다.

『그때의 제 문학세계는 싸르트르, 앙드레말로, 까뮈 등 서구문학에 젖어 있었죠. 당시 이대의 문학풍토여거든요. 그런데 결혼 후 해남에 내려오면서 농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는 내가 받아왔던 교육을 씻어내는 과정이었고, 변혁에 관여했던 문학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예술이 변혁운동에 복무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 문학은 결국 민중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는 데에 기여해야 하지 않겠어요?』이런 되물음을 예술에 대한 자기확신이기도 하다.

 88년에 중편소설「깃발」을 발표하면서 어느새 유명인사가 돼버린 홍선배는「깃발」에 얽힌 얘기를 이렇게 풀어 놓는다. 『너무 공포스러웠어요. 전 그 때 기독교 병원 앞에서 살아서 수없이 널려있는 시체들과 신음하는 걸 다 보았거든요. 그렇지만 민중들이 끝까지 도청을 지키고 투쟁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분노를 느낄 때 저렇게 큰 힘이 나오는구나!」하는 것을 느꼈지요』당시 광주엔 일용노동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기층청년들(그는 노동자를 이렇게 부른다) 몇몇과 인간적인 친분이 있었다는 홍선배는『항쟁 마지막날 저녁에 저도 도청에 들어갔었어요. 그때 그들이 총을 들고 끝까지 지킨다고할 때 난 무서워서 집으로 왔는데…그때 그들에 대한 죄책감이 결국 글을 쓰게 만들더군요. 「깃발」에서 지식인을 더 매도한게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매도였죠.』그의 이야기는「깃발」이 5·18이라는 엄청난 충격과 분노의 증언이자 치열한 자기고민의 산물임을 느끼게 한다.

「깃발」에서 그는 형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야.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지.」투쟁의 당위, 도청을 죽음으로써 사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노동자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형자의 의식에서도 나타났듯이 노동자들은 삶 자체가 변혁의 의지를 갖고 있어요.』라는 그에게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신뢰를 엿볼 수 있었다.

「담」이라는 글자가 이뻐서 홍희담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그는 원래 홍희윤이다.

 얼마전 신문지상에 나온 보도처럼 남산「안기부」에서 일주일간 있었다는 홍선배는 앞으로 계속 글을 쓰겠냐는 물음에『안기부 다녀와서 충격이 컸어요』라며 『또 쓰려고 하는데 부담이 커요. 아이들이 내겐 무엇보다도 중요하고…』라며 소박한 어머니 근성(?)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소재든 노동자적인 관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쓰고싶다』는 그의 의지는 삶의 방식이 운동선상에 있음을 가늠케 한다. 그래서인지 금년초에「이제금 저달이」라는『농업노동자들이 노동자들과 같이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형상화한 작품을 발표하였나 보다.

 이화의 후배들이 애정어린 관심으로 계속 지켜본다는 말에 넉넉한 미소를 띠우는 홍선배는 후배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단다.

『매일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면서 하루에 단 한번만이라도 노동자들의 임금과 농민의 삶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생활을 해나갔으면 합니다.』말을 마친 홍선배는 차를 한 잔 대접하겠다며 분주히 일어선다.

*홍희담
1964년 국문과 입학.
1988년 「깃발」로 문단데뷔.
1989년 「이제금 저달이」발표, 현재 광주에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