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항쟁 20주년 기념 특집

사진 : 이대학보 소장 자료
우리나라 민주화의 꽃을 피운 87년 6월 항쟁, 당시 대학가에 분 민주화의 폭풍은 이화를 비껴가지 않았다. 80년대 이화의 선배들은 사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역사의 그루터기 역할을 했다.

△ 80년대 초, ‘광주 항쟁 진상을 규명하라’

전두환 정권이 은폐하는 5·18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해 학생들은 진상 규명을 촉구했지만 정권은 학생들을 탄압할 뿐이었다. 당시 이화에는 사복경찰들이 곳곳에 초소를 세워두고 학생들을 감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화민주동우회 목혜정(사학·85년졸)회장은 “내가 다니는 학교가 남녀공학인가 싶을 정도로 사복경찰들이 포진해 있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학생들이 집회나 시위를 할 낌새만 보여도 곧장 연행되던 시기였다. 집회나 시위가 아니라도 ‘광주 항쟁 진상을 규명하라’, ‘독재 정권 물러나라’는 유인물을 뿌릴라치면 곧바로 사복경찰이 들이닥쳐 학생들을 연행해갔다.

그러던 중 81년 6월경에 조기숙 교수(무용과)가 생활관 건물 9층 옥상 난간에 매달려 시위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유인물 몇 장 뿌리다 연행되는 것을 보면서 좀 더 오래, 효과적으로 의견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결국 연행됐지만 보통 1~2분 내에 끝나던 시위가 수 분간 지속되는 성공을 거뒀다.

△ 85년, 총학생회 부활하다

대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연일 계속되자 전두환 정권은 1984년 대학의 학생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학원 자율화 조치’를 선포했다. 이에 85년 한신자(독문·88년졸)선배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총학생회(총학)가 다시금 건설됐다. 한 선배는 “총학 선거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매우 높아 투표율이 무려 80%에 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원 자율화 조치가 있었다고 해서 민주화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학생 시위가 총학을 중심으로 이뤄지자 정부의 총학 탄압 역시 덩달아 거세졌다. 한 선배는 “총학생회장이 되면 으레 수배령이 뒤따랐다”며 “경찰들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연행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고 말했다.

같은 해 총학생회장으로 임현주(경영·88년졸)선배가 학내 시위를 주도했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 선배는 “총학생회장이 돼 집회에서 발언을 한다는 것은 감옥에 갈 각오가 돼 있어야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 역시 집회 중 연행돼 1년4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 87년, 드디어 민주화를 이루다

87년은 이화인의 대규모 집회가 유독 많았던 시기다. 당시 총학생회장 임미애(경제·88년 졸)선배는 6·10 항쟁을 준비하면서 정말 놀라운 일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6·10 항쟁에 앞서 5월 말 대동제 기간에 ‘이화인 총궐기’를 진행했는데 이때 모인 인원만 약 1만 명가량. 임미애 선배는 “시위가 끝나고 이화교에 벗겨져 있던 하이힐은 몇 켤레인지 셀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운동가로 활동하던 학생들은 하이힐을 신지 않는 것을 감안할 때 이화교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하이힐은 일반 학생들의 참여율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또 당시 한 번 집회를 하면 보통 7천 명~1만 명이 모였기 때문에 기존에 갖고 있던 앰프로는 도저히 그 인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낙원 상가에서 앰프를 빌려왔는데 한창 집회 도중 시간이 다 됐다며 찾으러 와 집회를 주관하던 학생들과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그때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사버려!’라는 말이 터져 나왔고, 이는 운동장을 울리는 큰 함성으로 번져갔다. 어딘가부터 모자가 돌며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임미애 선배는 “이화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당시 가장 좋은 앰프를 사고도 돈이 남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화인들의 역량은 87년 6월10일, 역사적인 순간에도 빛을 발했다. 100만 명이 넘게 운집한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1만 명이 넘는 이화인이 참여했고, 이는 전두환 정권의 퇴진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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