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철균 교수(디지털미디어학부)

나이가 들면서 존재감이 약해지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나도 요즘 작고 형식적인 일에 점점 더 편집적으로 집착해간다. 

돌이켜 반성해보면 명색이 대학원생인 학생들에게 중간고사, 기말고사까지 치는 일은 심했다. 한 학기에 과제물을 다섯 번이나 내라고 하는 것도 심했고 시험범위가 이론서 14권이라는 것도 너무 심했다. 지난 학기에는 오후 3시에 시작한 강의를 진도 마쳐야 한다고 밤 10시에 끝낸 적도 있다. 학생들이 나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모든 게 경쟁 때문이라고 토를 달곤 했다. 카이스트와 서울대에 똑같은 전공이 생기지만 않았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둥. 이 마당에 공부 안 하면 너희가 밥이나 먹고 살겠냐는 둥.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것도 늙으면서 소심해지는 인간들이 으레 범하는 현실 왜곡이다.

경쟁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었다. 산업사회의 안정된 기반이 무너지고 정보사회가 된 이후 불모(不毛)의 무한경쟁은 이미 우리의 숙명적인 조건이 되었다.

현실은 늘, 있는 그대로 거기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얘기하고 또 얘기하는 것이 뭐가 대단한가. 문제는 삶의 내부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경쟁이 괄호 밖으로 내놓은 아픔들을 끌어안는 일이다. 이성만으로는 자기를 지키지 못하는 순간을 긍정하는 일이다.   

문득 몽골의 초원에서 보았던 개쑥부쟁이꽃이 떠오른다. 어느 가을 전세를 낸 지프차를 타고 내륙 깊숙이 들어갔던 해였다. 나는 사막 군데군데 피어 있는 개쑥부쟁이꽃, 몽골 사람들이 ‘스나치겐게’라고 부르는 꽃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신열과도 같은 감동에 온 몸을 떨어야 했다.  

몽골의 초원은 비옥한 초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막 지대다. 멀리서 보면 푸른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풀뿌리 주변은 온통 모래뿐이고 늘 강한 바람에 모래가 풀잎을 훑고 지나간다. 

몽골의 ‘초원’이란 사실 먼 곳의 카메라가 만들어놓은 환상이다.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 조금만 가까이 가면 물 한 모금 없는 불모. 이글거리는 지열. 영혼이 건조되어 불이 지펴질 것 같은 공기의 아지랑이 뿐이다.  

불과 3달 밖에 안되는 여름이 끝나고 날이 추워지면 ‘초원’은 금방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다. 9월에도 영하 30도를 가리키는 혹한에 땅은 얼고 녹고를 반복하면서 부스러져 가루가 된다. 그 가루는 모래가 되고 황토가 되어 몽고의 강한 바람에 흩날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몽골의 사막은 이동한다. 이제까지 언덕이었던 곳이 평지가 되기도 하고 평지에 언덕이 생기기도 한다. 지표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안간힘을 다해 생명을 유지하던 마지막 들꽃들에게도 모래바람은 불어간다. 그러면 그 곳도 그대로 사막이 되어 꽃들 또한 뿌리째 죽어 버린다. 

개쑥부쟁이꽃은 그런 척박한 모래땅에 수십 미터의 깊고 가는 뿌리를 박고 홀로 피어나는 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불모와 혹한에서 피어나던 그 풀꽃의 생명. 그 생(生)을 향한 사랑은 열렬하고 아슬아슬하다. 매년 겨울 지하 2.7미터까지 얼음이 어는 사막. 그 2.7미터 밑은 또 한 여름에도 녹지 않는 영구빙하층이다. 그 영구빙하층 밑에 얼지 않는, 물기가 존재하는 흙이 있다. 무릎까지 오는 가녀린 풀꽃을 피우기 위해서 개쑥부쟁이는 때로 지하 50미터까지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아 봄이 되면 새싹을 틔우며 푸르러진다. 풀꽃의 사랑이 사막을 잠시 초원으로 빛나게 한다. 

세상에는 풀꽃만도 못한 인간이 너무 많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내가 그렇다. 멀리 욕망의 헤드라이트를 밝힌 자동차들의 끝없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이 서울의 사막, 모래 먼지 사이로 굴러가는 개쑥부쟁이꽃 씨앗을 생각한다. 그 단단한 고요함이 아름답다. 어떤 불모에도 절망하지 않고 생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한 송이 꽃을 피우는 그 기나긴 의지를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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