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발생한 재벌 총수의 ‘보복 폭행’ 사건은 법치주의 사회에서도 재벌에 한해서는 ‘독단적 일 처리’가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사건 발생 후 한 달 넘게 쉬쉬해올 수 있었던 것은 재력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총수와 그 권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경찰당국 간 무언의 합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배짱이었을까. 한화 김승연 회장은 3월8일, 둘째 아들이 얻어맞고 들어오자 경호원들을 이끌고 직접 술집으로 향했다. 아들을 폭행한 이들을 청계산으로 끌고 가 경호원들을 동원해 구타했고, 폭행 당사자가 근무하는 술집으로 찾아가 보복폭행을 감행했다. 보복이 두려워 폭행 사실을 숨기고, 추후 경찰수사에서 김 회장과의 대질신문을 거부한 피해자들의 태도에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적 보복을 위해 회사 경호원들을 동원한 것도 황당한데 사건이 사회에 공개된 후 그의 태도는 어이없기까지 하다. 그는 MBC와의 인터뷰(4월29일)에서 “우리가 일방적인 피해를 당한 입장임에도 상대편을 고소고발하지 않고 원만하게 끝내는 걸로 했다”고 말해 폭력 사실을 부인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후 경찰의 출두 요청이 있었음에도 몸이 피곤하다며 응하지 않았다.

무모함으로까지 보이는 그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김 회장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재벌에 관대한 경찰문화’를 지나치게 믿은 것 같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미온한 태도를 보였다. 사건 당일 제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눈앞의 피해자를 보고서도 그냥 돌아갔으며 3월29일 내사 보고가 이뤄졌음에도 한 달 가까이 이렇다 할 수사를 전개하지 않았다. 한화그룹 최기문 고문이 전 경찰청장이었다는 점도 한화그룹과 경찰 사이의 로비 의혹을 부추긴다.

재벌에 대한 경찰 당국의 ‘관대한 처우’는 비단 이번 일에서 뿐만이 아니다. 비자금 조성·불법증여·정관계 불법 로비 등 여러 가지 비리를 저질러도 재벌은 늘 사법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설사 구속된다 하더라도 대통령 특별사면·보석금 등의 방법으로 곧 풀려났다. 과거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의 비자금 조성에 대한 검찰 수사는 중단됐었고, 두산그룹 회장은 회사 돈 366억 원을 빼돌리고도 불구속됐다. 심지어 삼성 이건희 회장은 불법 증여 개입 혐의를 받았지만 경찰에 소환조차 되지 않았다.

이러한 관행은 재벌의 또 다른 부정부패 및 비리를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 엄격한 경찰 수사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적용되지 않는 한 재벌 2·3세들은 권력이면 모든지 해결된다는 잘못된 특권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믿음은 새로운 잘못을 낳는다.

더 큰 문제는 재벌과 경찰 당국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다. 재벌에 대한 관대한 경찰문화가 지속될 경우, 재벌에 대한 반감 여론 및 계층 간 반목이 심화될 수 있다. 중앙일보가 작년 7·8월 한·중·일 세 나라 국민 2천5백여 명을 상대로 대기업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 반(反) 대기업 정서는 한국이 42.7%로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17.4%)보다도 훨씬 높았다. 또 경찰의 미온적 태도가 지속된다면 국민들은 경찰 수사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실제 김 회장 사건이 터진 후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티에서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경찰 신뢰도가 떨어졌다고 응답한 사람은 87%에 달했다. 사법 당국은 경찰 수사에 대한 불신은 현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김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사법 당국은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제시하고, 사건 은폐 의혹이 풀리도록 투명한 수사를 해야 한다. 아울러 고질적 문제로 지적된 재벌과 경찰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도 규명해야 할 것이다. 경찰의 수사권은 재벌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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