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언어 사대주의
심각한 언어 사대주의
  • 이대학보
  • 승인 2007.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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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업교수(불문과)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 중 하나는 아파트 이름을 외국어로 짓는 풍조다. 새로 지어 분양하는 아파트, 특히 서울, 부산, 대구와 같은 대도시의 아파트는 거의 다 ‘회사명+외국어’, ‘지역명+외국어’ 구조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롯데 캐슬’은 전자에 해당하고, ‘은평 뉴타운’은 후자에 해당한다.

이런 사회적 풍조는 새로 지어 분양하는 아파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기존의 아파트도 덩달아 이름 바꾸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만 해도 그렇다. 나는 화정에 사는데, 이 지역의 특징은 모든 아파트를 ‘O빛 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별빛 마을’, ‘은빛 마을’, ‘옥빛 마을’, ‘달빛 마을’ 등으로, 처음에는 좀 헷갈리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정겹기 그지없는 한글 이름들이다.

그런데 작년 10월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파트 게시판에 아파트의 새로운 이름을 공모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세 개의 아파트 이름들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쪽지가 각 호로 날아왔다. 모두 외국어로 된 이름이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화정 은빛 마을’ 대신에 ‘프라웰’(flowell)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현수막이 아파트 출입구에 내걸렸다. 언어 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아파트 개명과 관련된 이런 사회적 풍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사는 화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지역은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배를 많이 재배하던 곳이었다. 매년 5월 배꽃이 하얗게 피면 ‘꽃으로 이루어진 우물’ 같다고 해서 이 지역을 ‘꽃 화(花)’자에 ‘우물 정(井)’자를 붙여 ‘화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대로 ‘화정’에다 ‘O빛 마을’을 붙여 아파트 단지를 구분하였다. 새로운 아파트 이름을 공모하자, 누군가가 이런 사실에 착안하여 ‘꽃’이라는 뜻의 영어 flower에서 flo-를 떼고, 그것을 ‘우물’이라는 뜻의 영어 well에다 붙여 flowell이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멀쩡한 한국어 아파트 이름을 영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영어 이름으로 바꾸고자 했을까? 이 지역에 무슨 큰 사회적 변화가 생겨 기존의 이름이 부적합해진걸까? 아니면 외국인 입주자가 갑자기 늘어 한국어 이름이 불편해졌기 때문일까? 유감스럽게도 둘 다 아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새로운 영어 이름으로 바꾸어 아파트의 가격을 높여보겠다는 얄팍한 속셈 때문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어 이름에서 영어 이름으로 바꾸기만 하면 아파트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혹자는 영어가 세계어가 된 마당에 아파트 이름을 영어로 바꾸는 일이 뭐 그리 큰 문제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이면에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숨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언어 사대주의’다. 한문-일어-영어로 이어지는 ‘언어 사대주의’ 말이다.

우리의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라. 부끄럽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리의 언어로 행세해 본 적이 없다. 세종대왕이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한글을 창제했지만 조선말까지는 한문의 세계였다. 한문을 모르면 관리가 될 수 없었고, 사람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나이-연세’, ‘집-댁’, ‘이름-성함’의 쌍에서 보듯, 한글은 늘 반말이고 한문은 늘 존댓말이었다.

일본이 중국을 제치고 이 땅을 통치하자 이번에는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세상이 되었다. 일본은 1930년대 후반 조선어 말살, 창씨개명 등을 통해 한글 사용 자체를 금지하였다. 미국에 의한 해방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한글은 고문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언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945년 해방되어 이제는 한글로 제대로 행세할 수 있는가 했지만 이내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영어를 못하면 취직을 할 수 없고, 취직을 해도 승진은 할 수 없는 그런 세상 말이다.

이런 언어 사대주의는 우리말인 한글의 발달에 큰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주권 국민으로서의 문화적 자부심마저 없애 결국은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문화적 식민지로 만들 것이다. 이런 유감스러운 일이 벌어지기 전에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교육을 통해 언어가 없으면 문화가 없고, 문화가 없으면 민족이 없어진다는 역사적 교훈을 널리 이해시키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