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랑 헤어졌소’·‘공먼셤(공무원시험) 붙었다!’

학생문화관 1층 화장실 3번째 칸에 적힌 낙서다. 배설의 공간 화장실에는 연애·취업·사소한 고민 등 비밀스런 이야기들도 함께 배설되고 있다.

본교 중앙도서관·종합과학관 등 수업이 이뤄지는 15개 건물 화장실을 조사한 결과 학생이 많이 드나드는 학관·학생문화관 화장실에 낙서가 제일 많았다. 특히 변기에 앉아 쓰기 편한 앞쪽·오른쪽 벽은 낙서의 집합지라 할 수 있다.

화장실 벽에 꾹꾹 눌러 적은 이화인들의 이야기를 화장실 밖으로 꺼내보자.

△화장실은 성공적인 연애 상담소

‘대학생의 낭만은 연애’라지만 여대의 특성상 캠퍼스 안 로맨스는 불가능하다. 연애와 관련된 화장실 낙서 내용에는 남자친구가 없다는 외로운 낙서가 가장 눈에 띈다.‘소개팅도 안들어오고 미팅도 안들어오니 나더러 어찌 남자를 만나라 하오’라는 한탄에는 수많은 공감 댓글이 남겨졌다.

특히 댓글은 상담 효과까지 있다. 일종의 연애상담소처럼 속시원한 해결책이 댓글로 달린다. 생할환경관 1층 화장실 ‘혹시 고졸이랑 사귀어 본적 있어요?’라는 물음에는‘고졸이 걸린다면 헤어지는게 낫소’등의 낙서가 꼬리를 문다. 

화장실 벽에는 각자의 연애관도 가득하다.‘헤어지려고 이유를 만드는 것 같다’는 연애에 대한 후회도 보인다. 위태로운 연애사를 밝힌 낙서 밑에는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죽겠소’라며 재촉하는 글도 있다.

심리학회 프시케노트(Psychenautes) 김소현 회장은 “말하기 힘든 내용도 익명으로 밝힐 수 있고, 공감한다는 내용의 댓글이 낙서 한 사람 뿐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도 힘이 된다”고 낙서의 상담효과를 긍정했다.

△취업·미래 등 앞을 가로막는 진로 고민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화장실 낙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특히 수업이 많은 대형강의실·도서관 화장실에는 걱정섞인 이화인들의 낙서가 많다.

 ‘난 지금 1학년인데 왜 벌써 취업 걱정을 해야 되는거야ㅜ.ㅜ’학관 4층, 하늘모양으로 장식된 화장실 안에 적힌 낙서다. 학관 4층 대형 강의실 앞에 위치한 화장실엔 성적·시험 관련 낙서가 가득하다. ‘졸업 계절듣소. 학점 CDCDCD’등 비밀스런 성적도 공개된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중앙도서관 화장실에 빼곡하게 적혀있다.‘고시 생활로 늘은 것은 변비와 우울증’·‘취업 너무 힘들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살아왔는데 억울해 억울해!’등 공부하다 지친 이화인의 모습이 생생한 필체로 남겨져있다.

걱정 가득한 고백 밑에는 든든한 격려의 말도 있다.‘이번 시험도 망했다. 희망이 없다. 내 대학생활은 실패다’라는 낙서에는‘힘내시오 우리 아직 무지하게 젊소’·‘인생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안다오’등의 따듯한 댓글이 가득하다.

‘이화인들이여 제발 젊음을 좀 즐겨라. 젊었을때 학고(학사경고) 한번 맞아봐야 진짜 대학생활 하는거지’·‘C+따위 재수강 하면 되지’라는 걱정없는 이화인의 낙서도 곳곳에 보인다.

△화장실에서도 이어지는 ‘이화’자부심 

화장실에서는 졸업한 선배, 입학을 원하는 간절한 고등학생도 만날 수 있다. 이화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그들의 자취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졸업할 때가 되서야 처음으로 낙서를 해본다’로 시작하는 예비 졸업생의 낙서는 아름뜰·이화사랑 등 학교의 소소한 일상이 추억된다. 다시 학교를 찾은 졸업생들은‘힘들었지만 학부 졸업 후 사회에서 자부심과 자신감을 느꼈다. 사회에 나가면 이화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등의 메모를 남기기도 한다.

‘처음엔 불만족스러웠지만 이제는 이화를 사랑한다’는 재학생의 수줍은 고백도 보인다.‘학교 너무 삭막해’등 회의적인 낙서도 있다.

학관 화장실에 적힌‘2008학년도에 꼭 이화여대 학생이 되어 이 건물 이 화장실 이 칸에서 다시 이 글을 보길 바라며…’라는 고등학생의 낙서에는 ‘화이팅!’·‘힘내세요’등 이화인의 격려도 이어졌다.

화장실 낙서는 이화인들의 삶으로 쓴 글씨다. 유승희(인문·2)씨는“화장실 낙서에서 나름대로 교훈도 배우고 이화에 대한 공감도 얻는다”고 말했다.

매일 낙서를 보는 미화원들의 생각도 긍정적이다. 이화­포스코관 화장실 청소를 담당하는 김순순씨는 “낙서에 담긴 학생들의 생각이 귀엽고 신선하다”고 말했다.

화장실 낙서가 이화인들의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효과 때문일까. 사회과학대학 학생회는 화장실 낙서를 통해 학생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포관 화장실 곳곳에 붙어 있는 ‘사회대 말·말·말!’종이에는 학교복지사항·새내기에게 하고싶은 말 등이 적혀있다. 사회대 학생회는 한 달에 한 번씩 이 종이를 수거해 공유할 만한 낙서는 사회대 소식지에 게재해 보다 많은 이화인과 함께 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힘든 학교 수업에 지쳐도 화장실에 적힌 낙서에 울고 웃는 이화인들. 역시 학교 화장실의 묘미는 ‘낙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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