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이화글빛문학상 당선작 - 서수진 (국문·06년 졸) 연재소설

37.

아진은 어렴풋이 눈을 뜬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얇고 깊게 들어온다. 흥얼거리는 콧노래소리. 아진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희미하게 혜은을 찾는다.
“깼네요. 오래도 잔다.”
혜은은 아진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방을 들여다본다. 아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혜은을 바라보았다.
“의사선생님이 다녀가셨어요. 환자가 바뀌어서 놀라는 눈치던데요.”
아진은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머리가 어지럽다.
“그런데 병명은 같아요. 영양부족과 과도한 스트레스.”
링거액을 조절하는 혜은의 손동작이 익숙하다. 혜은은 링거바늘의 상태를 꼼꼼하게 챙긴다.
“도대체 둘이서 무슨 스트레스를 그렇게 번갈아 겪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잠시만 기다려요, 혜은이 웃으면서 방을 나간다.

아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댔다. 쟁반에 대접 하나를 얹어서 혜은이 들고 들어온다.
“조금 식었는데, 그래서 먹기 더 쉬울 거예요.”
아진은 쟁반을 받아든다. 전복죽이다.
“왜, 죽지 않았어요?”
혜은은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아진을 바라본다. 여린 갈색 빛의 고운 눈.
“나보다 먼저 쓰러져 버려놓고.”
병수발 드느라 죽어야하는지도 잊었어요, 혜은의 말이 가볍게 울린다.
“어차피 약속 지킬 생각이었는데.”
혜은은 잠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쉽게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 사람 관계란.”
혜은은 일어나 커튼을 젖힌다. 뭉툭한 햇빛이 가득 방을 채운다. 아진은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찌푸린다. 채광이 이렇게 좋은 방 창문을 커튼으로 꽁꽁 여며놓는 건 무슨 심보람, 혜은이 말한다. 커튼을 여미는 혜은의 뒷모습이 노란 햇살과 섞인다.

“당분간이에요.”
리듬을 넣어 혜은이 말한다. 뒤돌아보니 아진이 혜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햇빛을 받아 아진의 하얀 얼굴이 투명하게 빛난다.
“몸 나을 때까지. 사고의 원한으로 가해자의 집에 들어앉아 협박하다. 이런 누명은 싫어서.”
과장된 말투에 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혜은이 아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햇빛 받으니까 얼굴이 밝아 보인다.”
혜은의 말끝이 즐겁게 올라간다. 혜은은 다시 창가로 가서 커튼을 완전히 젖힌다. 비가 그친 후의 깨끗한 햇빛이 방 안 가득 들어찼다.


38.

아진은 가만히 난초를 바라본다. 난초가 지키고 있는 벽면이 휑하게 아진을 마주 본다. 고아하게 그 자태를 유지하려 꼿꼿이 몸을 치켜세우는 난초. 혼자 서있는 모습이 위태롭고 쓸쓸하다.

아진은 물감통을 뒤져서 코발트블루 색 물감을 집어 든다. cobalt blue. 바다색에 가까운 청록색. 물에 타 넣으면 태평양 맑은 바닷물이 된다. 캔버스에 칠하면 맑게 갠 가을 하늘이 된다. 아진은 물감을 투명한 컵에 풀고 한참을 바라본다. 보고 있는 눈마저 푸른색으로 물들일 듯 아름다운 색. 텅 빈 벽면에 풀잎들을 그려 넣는다. 청록색 수초와 풀과 꽃잎. 푸른색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다. 고아할 뿐 외로워 보이기만 했던 난초는 수풀 사이에 풍성한 잎사귀들 안에서 같이 어우러져 있다. 갈색 난초의 꽃망울에도 푸른 기운을 심어준다. 난초가 싱그럽게 웃는다. 한동안 난초를 바라보고 있던 아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캔버스를 꺼낸다. 네 번째 전시회를 제안한 곳에 제출할 포트폴리오를 만들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저희 대안공간의 취지 상 많은 돈은 못 드려요. 조건도 까다로워서 포트폴리오를 보기 전 까지 정확한 날짜를 드리긴 어렵네요.”

수화기 건너 건조한 목소리를 아진은 기억해낸다. 코발트블루 색 물감을 다시 집어 드는 아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코발트블루는 내가 좋아하는 색이야.
혜은은 그렇게 말했다.
언뜻 보기엔 차가운데 사실은 맑고 따듯해 너처럼, 이라고도.

겨울이 오는 길목이었다. 아진은 그림을 그리다말고 혜은을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푸른빛이 혜은에게 머물렀다. 물감을 집어 드는 혜은의 팔은 여전히 말랐었다.


아진이 붓을 내려놓은 건 창문 어귀로 내리는 눈발 때문이다. 푸른색 물감 너머로 희끗희끗 눈의 가닥이 굵어지고 있다. 아진은 한참을 창가에 서 있다. 첫눈이다. 한바탕 내리던 눈이 그치자마자 아진은 몸을 돌려 현관을 나선다. 아진은 누구의 발도 닿지 않은 눈을 밟기 위해 서둘러 오피스텔 입구로 내려간다. 걸음이 바빠진다. 눈이 그치기 무섭게 빗자루를 들고 나왔을 경비아저씨가 눈을 쓸고 있다.

“부지런하시기도 하셔라.”

아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경비아저씨를 흘겨본다. 아저씨가 아진을 알아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평소라면 고개를 돌려버렸을 아진이지만 혼잣말을 했던 게 미안해져서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눈이 그치기가 무섭게 밖으로 나온 건 바지런한 경비아저씨만이 아니다. 햇살이 아파트 입구 작은 공간에 스며들고 있다. 초겨울이라 그런지 더욱 보송보송하고 따듯한 햇빛이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한 가수에게 좋아하는 계절을 물었던 것을 떠올린다. 목소리가 낮은 그는 겨울이라고 답했다. 다른 계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따뜻함. 초겨울 눈이 내린 앞마당으로 따듯한 햇살이 비춘다. 아진은 햇살을 마시려는 듯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몸속으로 차가운 햇살이 스며든다.

따사로운 겨울의 오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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