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작가 고리키는 ‘세상에 젊음처럼 귀중한 것은 없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대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자꾸 젊디젊은 10~20대 자살률이 느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도 다양하다. 우울증에 시달리다, 성적에 낙담해, 이젠 ‘교복 치마가 짧다’는 선생님의 지적을 비관한 자살이다. 때문에 언론은 하루라도 자살 관련 기사를 보도하지 않으면 가시가 돋을 지경이다. OECD 가입국가 중 자살률 1위가 괜한 것이 아니지 싶다.

자살의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대부분 견딜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이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을 택했는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이 다소 충동적인 듯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살의 원인이 젊음의 치기든, 견딜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이든 분명한 것은 그들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점이다.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벌여야 할 나이의 사람들이 삶을 포기함으로써 빚어지는 인적 자원의 손실은 차치하더라도 사회에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는 심각한 문제다. 실제로 2001년에 1천152명이던 10~20대 자살자는 점차 증가해 2005년에 1천642명으로 약 40% 이상이 증가했다.

이러한 사회 흐름 속에서 ‘웰다잉(Well-dying)’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자는 움직임이다.

웰다잉 운동의 선두주자인 한림대 생사학(生死學) 연구소는 2005년부터 ‘웰다잉 전문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생사학 연구소장 오진탁 교수는 “행복한 죽음에 대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웰다잉은 ‘잘 죽기’위한 움직임이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삶의 의미 찾기’ 운동이다. 죽음에 임박하지 않은 사람도 웰다잉 운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새겨 보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처음 웰다잉은 노인이나 불치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작게는 죽은 후에 유산을 두고 벌어지는 가족 간의 분란을 막기 위해서, 크게는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유족들이 겪을 수 있는 혼란을 줄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살 예방’운동으로 그 성격이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1960년에 미네소타 대학에서 ‘죽음의 준비과정’이라는 교과목을 개설하면서 처음 시작했다. 또 1999년에는 국가 차원의 자살 예방 전략을 세우고 68개의 구체적 목표를 세워 실천했다.

미국 뿐이 아니다. 2005년 일본 정부에서 ‘자살방지대책기본법’을 통과시켜 자살에 대해 국가가 발벗고 나섰음을 보여줬다. 프랑스는 이보다 일찍 1994년에 자살을 국민건강의 최우선 해결과제 중 하나로 선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자살에 대처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수행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미국?일본?프랑스의 자살률은 우리나라에 비해 작게는 1/3, 크게는 1/7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자살예방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2004년 9월 보건복지부에서는 ‘국가자살예방대책 5개년 계획’을 수립했고, 한국자살예방협회 등의 민간단체를 지원해 자살예방과 생명존중 문화를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통해 2003년 대비 2010년에는 자살률을 20%로 감소시키겠다는 것이다.

잘 먹는 것이 중요한 만큼 잘 죽는 것이 중요한 시대다. 잘 죽는 것이 꼭 양지바른 곳에 묻히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잘 죽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후회 없는 죽음을 맞는 것이다. 또 남겨진 사람에 대한 배려 역시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 비춰볼 때 과연 자살이 잘 죽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죽음에 대비하고 공부해 어떻게 죽을지 생각해본다면 쉽게 자살을 결심할 수 없을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은 비겁한 변명일 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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