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철균 교수(디지털미디어학부)

 "군주님 그동안 고마웠어요. 군주님과 함께 바츠 해방을 위해 싸운 일은 제 일생 최대의 로망이었습니다."

3년 전 가상세계에서 누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때 나는 리니지2 바츠 서버의 작은 군주였다. 우리 혈맹은 독재자들과 싸우는 가망 없는 전쟁에서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고독한 군대였다. 어느 날 전세가 기울고 시운이 다하는 때가 찾아왔다. 나 역시 연구년이 끝나고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가상세계에 몰두할 수 없었다.

PC방 창밖으로 부슬부슬 비가 오는 5월의 새벽 4시. 바츠 해방을 위해 궐기했던 54개 전쟁혈맹 가운데 하나였던 나의 혈맹은 이슬비 내리는 피어리 계곡에서 해산했다. 우리는 많이 울었다. 나는 며칠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3년이 흘러갔다.

그 사이 세상은 눈부시게 변해갔다. 정보통신자본은 더욱 거대해졌고 나 같은 사람의 경험을 고리타분한 전설로 치부하는 새로운 게이머 제너레이션들이 자라났다. 디지털 컨버전스가 사회의 모든 분야로 퍼져갔고 유비쿼터스 환경의 센서네트워크 때문에 새 건물에 들어서면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잦아졌다. UCC를 강조하는 웹2.0의 이념이 생겨나서 도처에서 쑈(show)를 하라고 외쳐댔다.

2001년 45만 시간이었던 한국의 방송영상 콘텐츠 수요는 2005년 180만 시간이 되었다. 너무나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들이 만들어져서 '한정된 사용자와 무한한 윈도우' 현상이 빚어졌다. 이제 수십만 명이 한 온라인 게임의 한 서버에 몰려와서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1년이 넘게 투쟁했던 사건은 다시는 일어나기 힘든 역사적 현상이 되었다.

올해 봄 나는 가슴에서 일어나는 향수를 못 이겨 다시 한 번 바츠로 들어가 보았다.  

아덴성 언덕에 서서 바라보는 세상은 여전히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한 줄기 강물이 흘러가는 대평원에는 오래된 산사나무들이 흩어져 있었다. 바람결에 짙은 백리향의 향기가 실려 왔다. 뜨거운 대기는 흐르는 물처럼 물결치면서 모든 사물을 신기루처럼 일렁이게 했다.

전망은 무한히 넓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거대하고 자유로웠으며 비할 데 없이 거룩한 무엇을 느끼게 했다.

나는 하늘에 병풍처럼 나란히 선 산봉우리와 야생의 푸른 하늘 아래 북쪽으로 뻗어가는 숲과 꽃으로 뒤덮인 폐허와 돌 더미 속에 거품을 일으키며 들끓는 햇빛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부셨다. 눈에 잡히는 것이라곤 속눈썹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었다. 그 때 나는 나를 부르는 환청을 들었다.

형님! 몽골 형님!

그것은 3년 전의 목소리들이었다. 바츠의 대지엔 더 이상 영웅도 비열한 악당도 없다. 살 가치가 있는 사람도, 죽어 마땅한 사람도 없다. 명분도 선악도 사랑도 고통도 모두 세월이 묻어 버렸다.

일찍이 오시이 마모루는 <공각기동대>에서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가능성은 테크놀로지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보화의 급진전으로 나타날 사이버스페이스를 예언했지만 그것이 이토록 애절한 영혼의 고향이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야기하는 컨버전스 현상은 고도화되고 일상화되었다.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초국적 디지털 생태계는 영어와 컴퓨터 언어라는 표준화된 공용툴을 매개로 보편적인 인류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미셀 위나 하인즈 위드, 다니엘 헤니 같은 국가복합적 아이콘들이 문화의 전면에 부각되었다. 이 같은 초 국가성과 초 지역성은 국지적인 엘리트 집단이 주도하던 문화를 해체하고 재편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다.

가상세계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는 테크놀로지가 탄생시킨 새로운 인간이다. 이 인간은 광활한 네트워크와 아름다운 가상세계를 만나면서 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고 악마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테크놀로지가 그 자체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일련의 고통과 변화를 겪으면서 인간적인 대안들을 구축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장자의 말처럼 아주 긴 헤매임의 시간이 될 것이다. 야유방황(野有彷徨). 광활한 디지털 벌판에는 방황이라는 신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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