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화글빛문학상 당선작

35.

여자가 없어졌다.

아진은 불현듯 몸이 떨렸다. 달력을 보니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오늘이었다. 여자가 자신의 차에 뛰어든 것도, 반지를 맞춘 것도, 마지막 생기를 내어 삶을 지탱한 것도 모두 오늘 때문이었다.

아진은 여자가 머물던 방에 다시 들어갔다. 침대 시트와 이불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아진은 냉장고를 뒤졌다. 여자가 새로 담아놓은 반찬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아진은 겉옷도 입지 못했다. 동네를 모두 뒤졌지만 여자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아진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여자의 방에 들어섰다. 장롱과 서랍장을 거칠게 헤집었다. 침대 맡 작은 탁상 서랍에서 약통이 나왔다.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진은 약의 이름을 확인하려 했지만 시야가 흐릿해져서 볼 수가 없었다. 아진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이불을 덮어주는 익숙한 손길. 아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여자가 아진과 눈을 마주치고 빙긋이 웃었다. 아진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여자를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아진은 멍하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다시 자요. 피곤해보여요.” 여자의 목소리. “죽은 줄 알았잖아요. 정말 죽어버린 줄로만 알았어.”

여자는 아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작별인사도 없는 건 예의가 아니죠.” 아진은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빙긋 웃었다. “정말, 죽을 건가요, 남편을 따라서?” 여자는 말이 없었다. 아진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그러잡았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당신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나 정말 죽을 만치 사랑했었어요. 그 사람 떠나고 7년간을, 아직까지 잊지 못했으니까. 남편을 잃은 당신이 5년간을 죽으려고 했던 거 나 이해해요. 나라도, 나라도 정말 죽고 싶었을 테니까. 아니, 나도 정말 죽고 싶었으니까.” 아득한 시간이 몰려왔다. “하지만 혜은씨. 당신은 사랑했잖아요. 사랑한다고 끌어안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속삭였잖아요.

나는, 나는 못 그랬어요. 나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 마음을 내보이면 그 사람이 달아날까봐. 첫날부터 간직해온 마음을 내보이면 그 사람이 달아날까봐.” 아진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진의 심장을 조금씩 베어내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아진의 안에서 말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진은 이를 악물고 말을 뱉었다. “그 사람도 내 몸을 좋아했으니까. 다른 남자들이 모두 그랬듯, 그 사람도 나와 자고 싶던 것뿐이니까.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비치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라고. 만나는 내내 나는… 애가 타고 괴로웠어요.” 구겨져버린 데이지 그림을 펴보고 울던 때의 눈물이 그대로 솟아났다.

우두커니 혼자 남은 여관방의 생경스런 공기. 오랫동안 고여서 역한 내가 나는 울음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그래서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때 내가 떠났어요. 내 마음을 숨길 수 없을 때. 더 이상 나만 상처받기 싫어서. 그래요. 내가… 내가 떠났어요. 내가 떠나고 나 항상 그 사람만 원망했어요. 그래야만 살 수 있었거든요. 내가 떠난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겉으로 말 못 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더 힘들었을 텐데. 나 그런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 만나면 도망치거나 욕을 했죠. 더 잔인하게 짓밟으려고 했죠. 그래야 내가 살았으니까. 아니면 내가 죽었을 테니까.”

여자의 시선이 떨렸다. 아진은 울음과 뒤섞인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거 내 진심 아니에요. 나 사실 미안하단 말하고 싶었어요. 내가 상처주어서 정말 미안하다고. 그리고 정말 좋아했다고. 그런데 겁이 났다고. 다시 만나면 그간 지켜오던 내 마음이 무너질까봐 그게 겁이 나서 그동안 도망쳐온 거라고.” 지석의 얼굴이 스쳤다. 호숫가에 떠돌던 슬픈 얼굴. 복도에 기대있던 피로감이 짙게 밴 눈동자. 담배연기 사이로 미간을 찌푸릴 때 나타나는 주름.

“나는 그 후로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아니, 사랑했지만 그것을 믿지 않았어요. 이렇게 엉망진창인 나를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언제나 도망칠 뿐이니까.” 끈질기게 들러붙던 갈색눈동자. 몸의 한 부분으로 새겨진 그 눈으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 도망쳐왔는가. 하지만 조금도 달아날 수 없었다. 지금 아진은 또다시 갈색눈동자 앞에 서있다.

“혜은씨. 도망치지 말아요. 그렇게 도망치는 게 당신을 지켜주지 못 해요. 죽어버리는 건 당신을 지키는 게 아니라 당신을 버리는 거예요. 당신과 당신 남편 모두를 버리는 거라고요.” 아진은 여자를 붙잡았다. 떨리는 손에 모든 힘을 실었다. “죽지 말아요. 그 사람이 죽은 게 슬프고 아프면 그만큼 잘 살아요. 당신 남편이 죽은 게 당신을 죽게 했듯이 당신이 죽으면 또 다른 사람이 죽어요.”

아진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여자의 손을 붙잡고 얼굴을 묻었다. 손이 따뜻했다. 오랫동안 묵어서 마구 뒤엉킨 서러움이 안에서부터 끝도 없이 나왔다. 여자에게 향한 것인지 지석에게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원망인지 슬픔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었다. 온갖 감정이 뒤엉켜 무엇 때문에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고 아진은 그저 울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해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눈물이 앞뒤 가리지 않고 흘러내렸다. 모두 녹아 형체마저 없어질 것처럼. 혜은이 살며시 손을 빼서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36.

혜은은 가만히 달력을 바라보았다.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혜은은 남이 한 낙서를 보는 것처럼 생소하게 동그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흐린 날씨가 계속되다 오늘 아침부터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에 내리는 비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빗소리를 들으며 달력을 보던 혜은은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 창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혜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는 가느다랗게, 그러면서도 쉽게 그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재환은 시간보다 일찍 나와 있었다. 혜은을 보고 손을 들었다. 자리 앞에는 담배꽁초가 쌓여 있었다. “비가 오길래…” 혜은은 웃어보였다. “너 너무 말랐다.” 어렵게 입을 뗀 재환이 말했다.

재환은 다시 담배 한 가치를 꺼냈다. 삼계탕은 볼품없었다. 혜은이 삼계탕을 억지로 먹는 동안 재환은 소주를 마셨다. “여전히 안주는 없구나.” 혜은이 묻자, 재환이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납골당엔 다녀왔어?” 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삼계탕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아직은 이런 대화가, 어색하다. 날개 부분을 들어서 껍질을 벗겨내어 다른 접시에 버렸다. 살을 찢으니 뽀얀 김이 올라왔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기다리는 것에 대해서 얘기 안 해줘?”

재환이 소주를 따르던 손을 멈추었다. “왜, 늘 얘기했었잖아. 술 먹고 나면. 기다림은 고통이라고.” 재환이 말없이 혜은을 바라보았다. 침잠하는 눈. 재환과 눈을 마주친 혜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재환의 눈빛이 이렇게 슬프고 간절했던가. 빗소리가 들렸다. “아직 술을 덜 먹었네.” 혜은은 빙긋이 웃었다. 재환은 웃지 않았다. 소주를 잔 가득히 따라서 혜은에게 내밀었다.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라면서. 혜은은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습한 공기를 마셨다. 소주의 쓴맛이 축축한 공기와 함께 몸속에 퍼졌다. 혜은이 다리 부분을 찢어서 접시에 담아 재환에게 건넸다. “다리살, 좋아했잖아.” 재환은 접시를 받아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젠 안주도 좀 먹어.” 혜은은 수저를 들어 국물을 마셨다.

아직은 따듯한 온기가 남아있고 아직은 맛이 있다. 그래 아직은. 혜은은 재환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재환의 눈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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