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이화글빛문학상 당선작-서수진(국문·06년졸) 연재소설

33.

데이지.

처음 만나는 날 지석은 아진에게 꽃을 내밀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에겐 꽃을 주어야 옳은 거라고. 아주 작고 예쁜 데이지 꽃을. 빙긋이 웃는 미소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꽃을 건네는 미소가, 손길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그저 모든 것이, 그를 만나고 있는 순간과 그가 건네는 꽃과 그와 부딪히고 있는 눈빛이.

저녁 어스름의 벤치. 손이 예쁘다며 손을 만졌던 그. 손이 유난히 차가웠던 그. 그래서 살며시 손을 잡았던 그날. 온기를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했던 그날. 그날 아진은 집에 들어와선 방에 틀어박혀 데이지 꽃을 그렸다. 꽃이 시들기 전에 그 꽃을 그려서 되돌려 주고 싶었다. 마음을 줄 수 있다면. 차가운 손에 온기를 전해줄 수 있다면. 아진은 마음이 바빠 손이 매끄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데이지 꽃 한 송이가 소복하게 핀 스케치북을 화통에 넣고 아진은 지석을 기다렸다. 다음날 곧장 전화한 아진의 목소리에도 지석은 놀라지 않았다. 당연했으니까. 전화하는 것도, 다시 만나는 것도. 이렇게 전화하고 전화를 받고. 그렇게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 모든 것은 연결선상에 있었다. 적어도 그의 분명한 말씨라면. 지석은 얼마 마시지 않고 술에 취했다. 화통 속의 데이지 꽃이 바스락거렸다. 아진은 화통을 끌어안고 있었다. 지석의 눈동자가 천천히 술에 잠겼다. 흔들리는 빛깔. 지석의 갈색눈동자가 아진에게 머물더니 흔들렸다. 차가운 손. 그때 아진은 그의 차가운 손을 떠올렸다. 그 손을 잡아준다면 이사람 이렇게 흔들리지 않을 텐데. 흔들리는 거 이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데. 반듯한 사람에게서 흔들림을 발견했던 것이 아진을 슬픔에 젖게 했다. 어쭙잖게도, 아진은 그를 불쌍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흔들림이, 그의 고독이, 그의 외로움이. 아진의 마음에 다가왔다. 아진은 지석이, 불쌍해져 버렸다.

그래서 그를 따라갔던가. 어린 마음에 지석에게 위로가 되고 싶다던 바람은 싸구려 여관에 들어서게 했다. 그리고 지석은 아진을 넘어뜨렸다. 느닷없이 밀려드는 그의 입술에서 아진은 당연한 연장선이 끊어졌음을 발견했다. 미처 내려놓지 못한 화통 안에서 데이지 꽃이 구겨졌다. 네가 탐났다는 지석의 목소리와 함께.

아진은 꽃을 그리던 붓을 내팽겨 쳤다. 여자의 몸에 피던 데이지 꽃이 발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끊겨져 있었다. 꽃으로 온몸을 치장한 여자는 맨발로 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발로는 어디도 갈 수 없잖아.

여자는 아진에게 투덜거렸다. 여기 묶여서 어디도 갈 수 없잖아. 여자는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어 하는데 아진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못했다. 아진은 여자의 맨발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잊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떠나보낸 그날부터 지금까지. 7년의 시간을. 가라고,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악을 쓰면서 증오로 치를 떨었던 그날부터. 결국 아무 것도 잊지 못 한 것이다. 아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마지막까지 그에게 떠나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던 걸까.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아직까지 당신이 준 꽃을 그리고 있다고.

34.

사흘이 되도록 혜은은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전에 다투었다 해도 혜은이 일방적으로 화를 낸 게 전부였기 때문에 혜은이 돌아가는 것이 늘 싸움의 종지점이었다. 그는 늘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은 버티려던 혜은의 마음이 나흘에서 접은 것은 그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케이크와 선물을 들고 인심 쓰는 척 집에 들어서야지. 그러면 그는 몇 번을 반복한 일이어도 솔직하게 놀라며 혜은을 맞이할 것이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혜은을 안아줄 것이다. 혜은은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케이크를 골랐다. 병원이라고 전화를 받은 것은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서 나오고 있을 때였다. 생명이 위급하단 목소리가 사무적이어서 혜은은 되물었다. “교통사고가 있었어요. 피해자분이 크게 다치셨어요.” 혜은이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하얀색 천으로 덮인 후였다. 얼굴을 확인하라고 내리는 천을 혜은은 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목격자들 말로는 차에 뛰어들었다네요.” 날이 저문 후였고, 차가 워낙에 빨리 달리는 곳이라고 했다. 뛰어들기 전부터 이미 휘청대며 이성을 잃은 듯이 보였다고. “짐작되는 이유가 있나요?” 경찰이 물었다. 혜은은 고개를 저었다. “사고 직전에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는군요. 아주 격한 목소리였다는데요. 손혜은씨에게 무슨 말을 전했느냐고 물으면서 어머니 때문에 내 인생이 또 한 번 망가졌다고 욕을 해댔다는군요. 무슨 얘기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건조한 목소리. “집에 가겠어요.” 혜은은 무릎에 놓은 케이크 상자를 움켜잡았다. 경찰은 아무 말이 없었다. 혜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이 무슨 말인가를 건네려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혜은은 휘청대며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방에 앉아 케이크에 불을 켰다. 환한 낮에도 어두운 반지하방에 빛은 조금도 스며들지 않았다. 케이크의 촛불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생일 축하해.” 혜은은 작게 속삭였다. “노래는 못 부르니까 오빠가 불러.” 혜은의 밝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혜은은 해실해실 웃어보였다. “왜 안 불러. 이러면 나 화낸다.” 혜은은 짐짓 툴툴댔다. 이렇게 말하면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부탁을 들어주곤 한다. “알았어. 나 화 안 낼게. 그러니까…”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고개를 숙인 혜은은 케이크에 꽂힌 초를 바라보았다. 부옇게 촛불이 번졌다. 혜은은 눈가를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제발 노래 불러. 다시는 화 안 낼게.” 초가 녹아서 촛농이 케이크에 떨어지고 있었다. 혜은의 눈과 코가 붉어졌다. 혜은은 더 세게 손으로 문질렀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혜은은 말을 더 잇지 못 하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더 이상 붉어진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혜은은 소리죽여서 흐느꼈다.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혜은은 울음을 삼키고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아침이 되고 침대 맡에 쓰러져 잠들었던 혜은은 눈을 떴다. 촛농이 모두 녹아서 엉겨 붙은 케이크를 상자에 다시 넣어서 손에 들고 학교로 향했다.

그가 아침에 학교에 먼저 갔을 것이다. 아침밥을 해놓지 않고 간 것을 따져야겠다, 혜은은 마음먹었다. 그를 찾아내면 눈을 흘겨야지. 그러면 그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할 것이다. 공강이면 그가 머무는 과실에 갔다. 자꾸만 이가 떨렸다. 이제 겨울이 되려고 날씨가 이렇게 춥다고 혜은은 혼자 중얼거렸다. 과실에 뒹구는 담요를 끌어다 어깨에 덮었다. 오후가 되었는데도 그가 오지 않았다. 후배들 몇몇이 왔다가면서 혜은을 흘깃거렸다. 도대체 어디 가 있는 거야. 혜은은 담요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깼을 때는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혜은은 무서워졌다. “나 어두운 거 무서워하는 거 알면서. 얼른 와.” 전화기가 꺼져있어서 음성을 녹음했다. 좀처럼 전화기를 꺼두는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다. 하지만 음성을 들으면 부리나케 달려오겠지. 어디에 있든지 혜은을 찾아올 것이다. 혜은은 자꾸만 추워서 담요를 끌어안고도 온몸을 떨었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텅 빈 과실에 울렸다. 혜은은 핸드폰을 손에 꼭 잡고 다시 잠을 청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