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를 타고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무리는 더 이상 야훼를 믿지 못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무지개의 언약에도 불구, 어떠한 수해가 재발하여도 인간의 힘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늘을 찌를 듯 높은 탑을 쌓아올린다. 이제 유일한 인간종인 그들은 한데 모여 지냈고, 하나의 母어를 사용하였으며, 전 인류를 위한 피난처 건축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만인이 마치 한 사람 같았고 나의 삶과 너의 삶을 구분치 아니하였으며 오직 자신들만을 믿고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 불신이라니, 사랑하는 인간들에 의해 고립된 야훼는 배반감에 격노하여 그들 각자에게 다른 마음과 다른 말을 내렸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탑은 쌓아지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홀로 고립되었다. 야훼의 보복은 성공을 거두어 그들은 사랑하던 서로를 배반하고 불신과 노여움을 품은 채 떠나 세상 각지로 흩어진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바벨](Babel, 2006)은 그로부터 수없는 낮과 밤이 흐른 지금, 과거 하나의 원형적 삶을 살았었던 '그들이 이제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보이려 쌓아올리는 피투성이 위령탑이다.

모두들 전혀 다른 삶의 자장에 속해 있다. 단절, 단절, 단절. 한 육체의 분쇄된 살점이 허공에 날리고 몇몇이 어쩌다 엉긴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것은 끝없이 괴로운 여백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바벨의 언어, 뒤죽박죽이며 대개 파국으로 향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한때 하나의 모어를 가졌으며 태어나 살아 있는 한 완전히 잃거나 잊을 수 없는 자들이므로.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를 아픔이다.

우리는 [바벨]에서 드러나는 여러 고통의 모습들을 목도하며 그러나 무엇이 원형적 고통인가를 느끼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무력하나 동시에 무척 힘이 세다. 작은 장난일 뿐이었는데 결국 자신들을 죽이기까지 이르며,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파국인가 했더니 잘 복원되는 가족이 있으며, 행복할 수 있었는데 다 잃고 추방되며, 모든 것에서 배제된 소녀는 상처를 몸부림치며 그러나 살아간다.

화면 속의 고통과 나의 고통은 모든 건너에서 공명한다. 함께 벽 앞에 서고서야 기대할 수 있는 넘어섬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다. 언어학자로서의 발터 벤야민은 같은 의미를 가리키는 여러 譯語들을 한 자리에 모아 두면 비로소 하나의 근원적 의미가 밝혀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냐리투 감독 역시 많은 다름을 한자리에 그러나 느슨하게(중요한 것은 긴밀성 아닌 타자성이고 그 차이 속에서 옅은 섬광으로 동시간성이 비칠 뿐이다. 각 사건의 고리가 강화된다면 그만큼 개별성은 약해질 것이므로) 가로엮으려 한다.

우리는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영화를 보며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 多를 깨닫고 사유하는 가운데 비치는 것은 一로의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의미로 ‘바벨탑 쌓기’에의 갈망이다. 홍수에 가만히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의 무력, 태초로부터 가졌고 그러나 덕분에 계속 쇄신하며 번성할 수 있었던 그 나약을 까닭으로 다시 실행하는 도전이다. 우리는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로 하늘로 탑을 쌓았던 業을 지닌다. 이 모든 비극과 선험적 한계에도 불구, 다시 우리가 우리들의 구원이기를 원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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