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글빛문학상 당선작-서수진(국문·06년졸)연재소설

31.
늦은 아침, 아진은 적막감에 몸을 일으켰다. 아진이 방에 있으면 조심스레 집안을 오가며 청소를 하거나 밥을 지었던 여자의 움직임이 들리지 않았다. 아진은 이불을 걷어내고 거실로 나왔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실. 저녁 무렵의 적막이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아진은 여자의 방문을 열었다. 여자가 없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이제 곧 죽을 것이다, 자기암시를 걸면서.

여자가 물끄러미 아진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침대 옆에 앉아서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아진은 서둘러 말을 찾았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아진의 느닷없는 외출보고에 여자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은 문을 닫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만 같아서 장롱을 열어 옷을 꺼냈다. 작업실에나 다녀와야겠다, 아진은 생각하면서 성급하게 옷을 입었다.

신사동 작업실 앞에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진은 순간 d를 떠올렸다. 아진을 확인하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반가운 얼굴을 했던. 짜증스러운 얼굴로 내치면 팔을 잡고 울먹거렸던. 아진은 이내 d를 떠올렸단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지석은 며칠간 면도를 하지 않은 듯 수염이 제멋대로 길어있었다. 반듯한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져 눈코입만 닮은 다른 사람 같았다. 지석은 아진을 확인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눈동자에 깊은 피로가 스쳤다.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아진은 지석을 향해 걸었다.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가는 복도에 또각거리는 아진의 구두 소리와 엷은 지석의 숨소리가 뒤엉켰다. 지석은 벽에 기대있던 상체를 일으켜 아진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아진은 지석의 앞에 섰다.

“너는 마지막까지 내게 마음을 열지 않더구나.”

아진은 지석 너머 작업실 복도의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작은 그림. 데이지 꽃이 그려져 있었다. 아진이 처음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아이보리색 환한 바탕에 연분홍 꽃이 소담하게 아진을 바라보았다.

“너를 버리고 싶었다.”

지석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응집된 시간이 묻어나왔다.

“이번에는 내가 너를 버리고 싶었다. 예전에 네가 내게 그랬듯이.”

아진은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너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

지금 당장 꽃을 그리고 싶었다. 붓을 잡고 싶어서 손이 떨리었다.

“나를 사랑하긴 했니?”

지석은 아진의 어깨를 잡았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를… 기억하긴 하니?”

시간이 공기와 함께 멈추었다. 갈색눈동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진은 지석을 뿌리쳤다.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지석을 지나 작업실 문을 열었다. 손이 떨려서 열쇠를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떠난 건 너야.”

땀이 배어 문고리가 헛돌았다. 아진은 손에 힘을 주었다.

“붙잡을 기회를 주지 않은 건 너였어.”

지석의 목소리가 닫히는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아진은 황망히 캔버스를 꺼냈다. 물감통을 엎질러서 물감을 찾았다. 지석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아진은 붓통을 바닥에 엎질렀다. 세필붓을 골라들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아진은 물감을 골랐다. 연분홍 물감을 찾아야한다. 손놀림이 빨라졌다.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아진은 어지럽게 펼쳐진 물감과 붓 사이에 주저앉았다. 손은 여전히 물감을 찾고 있었다.

32.
밤이 늦도록 여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혜은은 자꾸만 몸을 뒤채며 잠에서 깼다. 꼬박 밤을 새운 새벽녘 혜은은 불 꺼진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아직도 어둠은 심장을 먹먹하게 만든다. 아직도 적막은 팔다리가 저미게 만든다. 아직도 그의 부재는 혜은을 저먹하게 만든다. 혜은은 가만히 반지를 만졌다. 어둠 속에서 살며시 다이아가 반짝였다. 작고 사랑스러운 모양으로 다이아는 가만히 혜은을 바라보았다. 꿈에서 울먹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항상 오빠를 떠나려고 했지, 혜은은 중얼거렸다. 익숙해지지 않는 어둠이 혜은의 말을 삼켰다. 항상 도망치려고 했어, 그러면 오빠가 나를 데리러 오니까. 그때 오빠의 표정이, 내음이 좋았어. 혜은은 적막을 깨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진심이 아니었는데. 도망칠 때마다 내가 다시 돌아올 거란 거 몰랐어? 늘 그렇게 두려웠어? 항상 불안했어? 내가 오빠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시 생경스런 적막이 혜은을 감쌌다.

혜은은 반지를 집어던졌다.

“끝이야.”

헤어지자고 말하는 건 혜은의 버릇이지만 반지를 집어던진 건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진심이라고. 나는 오빠가 지겨워.”

습관에서 시작된 다툼이었는지 모른다. 그날따라 혜은은 평소보다 더 날이 서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끔찍했는지도. 그는 무릎을 꿇고 떨어진 반지를 찾았다. 침대 밑으로 굴러들어간 반지를 찾기 위해 그는 몸을 더 깊이 수그렸다.
“한결 같은 모습. 나 그런 거 질린다고.”

먹다만 밥상이 차갑게 둘 사이에 있었다. 혜은은 웅크리고 침대 안으로 손을 더듬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늘 이런 식이야. 나한테 화나지 않아?”

침대 속으로 손을 뻗어 그가 반지를 꺼냈다.

“화낼 줄 몰라? 차라리 욕이라도 하라고.”

그가 일어서서 반지를 건넸다. 선량한 눈.

“그런 눈빛 좀 그만 해. 착한 것도 신물이 나.”

혜은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혜은은 그의 손에 있는 반지를 집어서 다시 한 번 집어던졌다.

“이러니까 오빠 엄마가 도망갔지.”

그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리는 얼굴을 보면서 혜은은 제멋대로 말을 뱉었다.

“오빠가 이렇게 못나게 구니까.”

사람은 때로 끔찍할 정도로 영민해서 어떻게 해야 상대가 크게 다칠지 계산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똑바로 들어. 나 다시는 안 와. 지긋지긋한 오빠한테 다시는 안 와.”

혜은은 그대로 방을 나왔다. 그는 언제나처럼 붙잡지 않았다. 혜은은 당황한 마음을 다잡으려 혼자 소리치며 더욱 화를 냈다. 일주일은 돌아오지 않을 거야, 혜은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씩씩거리며 길을 걸었다.

반지를 만지는 혜은의 눈에 물기가 서렸다. 무서웠겠다, 혜은은 눈을 감았다. 많이 무서웠겠다, 혜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적막을 가르며 흘렀다. 말을 뱉자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혜은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아직 깨나지 않은 어둠이 혜은의 등을 쓸어내렸다.

33.
아진은 y가 준 사진을 꺼내들었다. 여자는 여전히 되바라진 붉은색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수치심은 모두 잃어버린 듯 웃고 있었다. 아진은 여자를 그렸다. 풀어진 눈, 벌어진 다리, 도발적인 입술을. 새빨간 붓질은 터치를 그대로 남겨서 강한 느낌을 살렸다. 여자의 얼굴을 그리다 벌어진 입술 대신 연분홍색의 데이지 꽃을 그려 넣었다. 여자의 입에서 자그마한 데이지 꽃이 수줍게 피었다. 여자의 어깨에도 가슴에도 배에도 성기에도 다리에도 아진은 데이지 꽃을 그렸다. 새빨간 여자의 몸에서 소담한 꽃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아 피었다. 실처럼 가는 이파리 하나하나를 수놓듯 그려가면서 어느새 여자의 몸은 데이지 꽃으로 뒤덮였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