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말, 계열선택 앞에서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점수와는 별개로 모든 과목에 흥미가 있었지만 자연계열로 진학했다. 대입준비에 집중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생명과학과에 지원하면서 나는 다소 생뚱맞은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다. “수리과학을 공부한 인문학도가 되겠다”고 말이다. 수학만이 과학의 도구가 아니라 언어도 과학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7차 교육과정은 계열구분이 없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심화학습을 이유로 자연계열에서는 사회를 배우지 않고, 인문계열에서는 과학을 배우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10년 후,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과학자와 기초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인문학자들이 과연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오래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을 보면서 우주에 대한 꿈과 동경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을 공상가로 불렀으며 그들의 존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공상가들의 이론이 체계 과학으로까지 발전하여 인간 삶의 형태는 물론이고 환경까지 빠르게 바꾸어 놓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첨단은 그것에 대해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그것도 현실의 사고와 관념에서 과감히 이탈하는 사람들이다. 첨단 기술의 시작은 누군가의 ‘상상’ 이었다. 과학을 공부할수록 직관이 큰 역할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실험의 성공이나 중요 사실의 발견은 상상력 없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 상상은 공부보다 더한 당위가 된다.


학문을 하는 이유는 이 세계에 관해 알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나는 누구인가’의 해답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학문하는 자의 태도는 어떤가? 그토록 바라던 대학은 ‘친구에게 출석을 부탁하고 잔디밭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보는 낭만은 없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공 외의 과목은 당연히 교양이라고 생각한다. 교양을 쌓는 것과 생계의 방편을 마련하는 준비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여전히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섬유 등 5대 품목이 10여 년째 한국을 먹여 살리고 있다. 국내 대기업 기술관계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기술에 도달해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개념이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세분화된 학문적 풍토로 인해 이에 적합한 인재를 찾기 힘든 수준이다.” 라고 말한다.


일부 기업과 학계는 이런 답답한 현실에 대한 해법을 에드워드 윌슨이 주창한 ‘통섭’에서 찾고 있다.? 통섭은 다(multi-)학문적 유희를 넘어선 범(trans-)학문적 교류를 향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해 인간의 지식은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섭이 몇 사람의 선구적인 시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학문 영역에 뿌리내려 학문의 양상 자체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교육의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 그러려면 대학이 차지하는 애매한 위상부터 수정되어야 한다. 취직이 아닌 진짜 학문을 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말이다.

생명과학과 3학년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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