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오렌지'서평
문학회 새벽 문지영(컴퓨터·4)

작품의 의도는 제목에서 드러난다고 하던가. 그런데 이 작품, 만만치 않다. 마치 암호 같은 제목,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다.

 

제목에 사용된 ‘오렌지’라는 단어는 십대 특유의 은어의 느낌을 주는 것을 넘어서 (말레이시아의 오우랭Ourang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의미하며, 오우랭의 영국식 발음은 오렌지와 비슷하다)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했던 작가의 경험이 작품에 크게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작가의 아내가 말레이시아에서 미군 병사들의 폭행으로 인해 유산을 경험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는데, ‘시계 태엽 인간’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의 제목과,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작품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지 예상할 수 있다.

 

15세의 소년 알렉스가 3년여에 걸친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진행 형식으로만 보면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웃음을 주는 허풍쟁이 소년 홀든과 달리 「시계 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는 폭력과 마약을 좋아하는 살인자로 묘사된다.

 

작가는 알렉스의 삶을 통해 정부나 사회가 개인의 의지를 좌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독자는 자칫하면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갱생요법’에 태엽의 의미를 국한시키기 쉬운데, 들여다보면 태엽은 알렉스의 삶 전반에서?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를 보면 흥분하고 즐거워하는 알렉스의 본성은 사회가 돌려놓은 태엽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는 작가가 실제로 살고 있었던 미국 사회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폭력과 성적 문란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미국 사회를 고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당시 미국의 사회상 외에 작품의 행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문제이다.

 

인간은 모두 태엽이 박힌 오렌지이다. 사회는 구성원의 탄생과 동시에 그의 태엽을 돌린다. 작품은 지금 나의 태엽은 무엇으로 인해 감겨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감은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속답하는 것은 이르다. 갱생 요법 이후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알렉스에게 폭력에 대한 기쁨을 되돌려 준 것은 정부의 최면 요법이었다. 정부는 알렉스가 치료되었으며 자유 의지를 회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각종 요법들과 알렉산더 무리와의 만남과 같은 모든 사건은 알렉스라는 오렌지에게 방향을 바꾸어 태엽을 감은 것에 불과했다. 알렉스는 여전히 돌려진 태엽의 방향대로 움직이는 동체일 뿐이었다.

 

각종 시험과 과제들이 쉴 새 없이 몰아닥칠 2007년 1학기를 살아갈 이화인들이 바쁜 일정이 돌리는 태엽으로 움직이는 오렌지가 되지 않길 바란다. 자신의 태엽이 어떤 힘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치열하게 의식해야 한다. 작가는 개인의 태엽을 돌리는 것은 알렉스에게 씌워졌던 전선 모자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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