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철균 교수(국어국문학 전공)

어렸을 때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1914)을 읽었다. 갓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한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사상을 배우는 이야기였다. 어느 날 선생이 학생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선생인 나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곧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자신이 기만당한 앙갚음으로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으려는 결과를 낳을 겁니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습니다.”


옛날 나는 이 구절을 선생의 소심한 결벽증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이해하고 웃었다. 나 자신 선생 생활을 14년 쯤 한 뒤 다시 『마음』을 읽어보았다. 이 구절이 얼마나 강하게 마음을 울리는 지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의 이 쓸쓸한 각오는 내가 해야 할 각오라는 기분이 들었다.


21세기 초의 정보화 혁명과 세계화는 지구촌 곳곳에서 전통을 해체하고 경험의 권위를 무너뜨렸으며 개인의 창조력을 해방시켰다. 문화의 영역에서 과거에 지배적이었던 것들은 종속적인 위치로 몰락했으며 과거에는 비천했던 양식에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비신학적인 계시가 나타나 실질적인 영적 안내자가 되고 문명을 구축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화려한 시대에 나같이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헤매게 된다. 세상에 제일 불행한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은 많고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사람이라지만 인생은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 풀려간다. 22살에는 문학평론가였다가 27살에는 소설가였고 28살에는 한국현대시 연구자였고 29살에는 창작론 선생이었고 35살에는 발레대본작가였고 38살에는 영화시나리오작가였고 40살에는 게임시나리오작가였고 42살에는 사이버스페이스 연구자이다. 헤매고 헤매다보니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나는 아마 평생 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 사이를 방황하다 죽게 될 것이다.


문제는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길을 몰라 헤매는 학생이 찾아와도 명색이 선생이 똑같이 헤매면서, 도무지 이쪽이요 하고 길을 열어줄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창작의 좌절감 위에 학생들을 제대로 못 가르친다는 좌절감이 더해졌다.


그런데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데도 학생들 취업은 너무 잘 되고, 학부는 워크샵, 해외 연수, 해외 파견 교육, 산업체 위탁 과제들로 잘만 돌아가며 교수님들은 모두 싱글벙글 웃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자기기만을 하기로 했다. 대학에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필요하지만 나 같은 엉터리도 필요하다. 교육이란 무서운 것이고,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으로 해서 많은 학생들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저지당하는 일이 많다. 나 같은 자는 자기 자신이 헤매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호기심을 잘 이해하고 뭐든지 덮어놓고 격려한다는 미덕이 있다.


어차피 인간은 선택하면서 발달하는 동물이다. 다른 사람과의 만나면서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선택해서 행동한다. 타인을 배우면서 자기를 독특하게 창조하며 그 타인을 매개로 상호의 차이를 존중하고 깊은 곳에서 연대한다. 학생에게 선생은 그런 타인인 것이다.


매학기 각양각색의 관심사와 천차만별의 능력을 가진 신입생들이 들어온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들. 각자 자기가 꿈꾸는 드래곤을 잡으시오. 선생인 나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난 그저 약간의 사냥법과 내가 가는 길 정도를 보여줄 수 있을 뿐입니다.


나는 계속 헤매다가 길 위에서 죽을 작정이오. 어떤 집에도 깃들지 않고 어느 마을에도 정착하지 않고 무엇으로도 완성되지 않을 것이오. 절대로 일가를 이루지 않을 것이며 대가로 존경받지 않을 것이오. 객사가 나의 꿈입니다. 나는 끊임없이 욕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목말라 할 것입니다. 나의 생은 항상 다른 곳에 있을 것입니다. 망망한 디지털 사막의 광야에서 끝없이 어딘가를 가고 있을 것입니다. 가다가 기력이 다하는 그 지점에서 죽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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