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주간미술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너 아직도 기사를 안 읽었단 말이야?”
y는 잡지를 손에 든 채 전화를 하고 있다고 했다. 잡지를 퍼덕거리는 소리가 과장되게 울렸다. 들떠서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y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진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았다.
“메인은 아니지만 꽤나 비중이 있어.”
y는 킬킬댔다. 아진은 찬장을 열어 커피통과 잔을 꺼냈다. 손잡이에 빨간 꽃이 그려진 작은 잔이었다. 빨간 꽃이 그려진 잔과 파란 꽃이 그려진 잔이 세트로 박스에 담겨 있었다. 한 눈에 예뻐서 집어 들고 보니 커플찻잔이라 쓰여 있었다. 손님용으로 쓰지 뭐, 아진은 누군가에게 말하듯 중얼거리며 찻잔을 구입했다. 한 번도 물기가 닿지 않은 도기의 까끌함이 손에 전해졌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진은 깨달았다.
“안 그래도 표지에서 너 그림 보고 내가 심장이 덜컹했다는 거 아니냐. 또 어떤 욕지거리를 해놨나 하고. 그런데 야, 이거 네가 직접 보면 너도 놀랄 거다. 칭찬이 거의야. 기대주라는 말부터. 너 다음 전시도 문제없겠어.”
아진은 커피가루를 잔에 넣었다. 헤이즐넛의 향이 달콤하게 올라왔다. 아진은 커피포트를 바라보았다. 물이 끓었다. 아진은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고 둘러대며 전화를 끊었다.
<주간미술>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여자가 밖에 다녀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빼서 가져온 것이다. 아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잡지를 들었다. 모자이크처럼 짜깁기한 표지사진에는 아진의 그림과 사진도 들어있었다. <주간미술> 잡지의 몇 장을 넘기면 편집장의 필체로 이번 호 잡지에 대한 신변잡기적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반듯한 글씨와 정돈된 문체로.

이제 가을도 다 저물어 가는군요. 이번 호는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의 냄새를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부쩍 차가워진 바람으로 느낄 수 있는 겨울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나가는 가을을 자꾸만 붙잡으려 하는 마음은 과거를 잊지 못 하는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않겠습니까. … 지난 호 잡지에서 새로 시작한 ‘직접 만나는 사람’을 읽은 지인들이 호평을 해주었습니다. 딱딱한 평론보다 편하고 일상적인 글과 그림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쉽고 편하게 쓰는 것이 도리어 더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럴싸한 거짓말보다 서툰 진심을 꺼내는 것이 더 힘든 것처럼 말이죠. … 나뭇잎이 다 떨어져야 겨울이 오, 지나간 시간들을 다 떨어뜨려야 우리의 삶도 보다 성숙한 계절로 넘어가겠지요. <주간미술> 역시 버려지는 것들의 하나로 여러분의 성숙을 돕길 소망해 봅니다.

아진은 <주간미술>을 덮고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빌딩들 사이사이로 차들이 오간다. 사람들은 부쩍 차가워진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서둘러 길을 지나고 있다. 여자의 모습을 찾다가 그만 두었다. 하나의 점처럼 변해버린 사람들을 아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거를 버린다는 것. 점처럼 변해서 익명으로. 타인으로. 그렇게 스쳐가듯이. 지난 시간을 모두 떨어트리면 성숙이 아니라 공허가 남지 않을까. 창가에 언뜻 스친 자신의 얼굴이 타인처럼 낯설었다. 손에 든 헤이즐넛 커피가 온기로 전해졌다. 아진은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타인들이 스쳐갔다.

28.

그가 작은 의자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아주 넓은 들판이었고 시야에 보이는 건 흙바람뿐인 곳이었다. 그곳엔 그와 혜은만이 있었다. 그는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앉아있었다. 소매가 짧아서 팔이 드러나고 바지도 짧아서 다리가 드러났다. 가느다란 다리와 양말도 신지 않은 하얀 발. 제대로 여며지지 않은 재킷이 바람에 따라 펄럭였다. 소매의 단추를 꿰매놓은 실이 풀어져 제멋대로 움직였다. 혜은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있었다.
“자꾸 어린애처럼 왜 그래?”
혜은이 뒤돌아 그를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는 발을 구르며 떼를 썼다.
“나를 혼자 두지 마. 나를 버리고 가지마.”
파란색의 작은 의자. 의자가 그에게는 매우 작아서 그가 앉아있는 것이 매우 위태로워보였다. 못질이 엉성해서 여기저기 못이 불안하게 튀어나와있고, 페인트칠도 벗겨져 둔탁한 나무색을 드러냈다. 흙바람이 매캐하게 올라왔다. 목이 칼칼하니 아팠다.
“나는 네가 떠날까봐 두려워. 내가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워. 넌 언제나 달아나려고 했으니까. 넌 나를 필요로 했지 나를 사랑하지 않았잖아.”
그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너를 사랑한 건 나뿐이야.”
혜은은 울컥해서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내가 얼마나 오빠를 사랑하는데. 난 달아나려고 한 적 없어.”
그가 울음을 그쳤다.
“그 말, 정말이야?”
여전히 훌쩍대며 그가 혜은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양복에 꼭 끼인 다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혜은은 허리를 숙여 그와 눈을 맞추었다. 눈이 젖어있었다. 혜은은 그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래, 울지 마. 이렇게 같이 있잖아.”
“그거면 됐어. 응, 그거면 됐어.”
그가 웃었다. 평소처럼 미소 짓는 게 아니라 해죽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혜은도 따라 웃었다.
혜은은 꿈에서 깼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언제 잠이 들었던 건지, 아직 한낮이었다. 여자는 외출을 했는지 집에 없었다. 혜은은 땀에 젖은 시트를 걷어냈다. 그는 혜은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미소 짓고 혜은을 안아주었다. 그거면 되었는데. 혜은은 욕조에 물을 담았다. 침대시트를 끌어내 집어넣었다. 세제를 풀고 거품을 냈다. 이불을 담가 놓은 채 혜은은 손을 씻고 거실로 나왔다. 혜은은 그를 위로한 적이 없었다. 위로하는 것은 언제나 그였다. 혜은이 화를 내고 토라지고 투정을 부리고 울었다. 쌀을 안치고 국을 끓였다. 여자가 즐겨먹던 반찬들을 만들었다. 파래무침은 덜 시큼하게, 감자볶음은 서로 엉겨 붙지 않도록, 고사리는 부드러워서 잇몸에 부담스럽지 않게. 그도 혜은에게 화를 내고 토라지고 투정을 부리며 울고 싶었을까. 그런데 왜 그러지 않은 건지. 이제 와서 울며 보채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만날 수 있는데 왜 이제야. 혜은은 싱크대에서 반찬통을 모두 끄집어내었다. 여자는 집에서 만들어먹지 않아서 반찬통은 새것 그대로이다. 요리하기 싫어하는 여자가 반찬통과 접시들을 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혜은은 반찬들을 모두 통에 담아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두려워서였어? 내가 떠날까 두려워서 내 손을 붙잡고 그렇게 웃어준 거야? 내가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서 도망치는 나를 붙잡지도 못하고 뒷모습만 본 거야? 전부… 두려워서 그랬던 거야? 욕실로 들어가 침대시트를 발로 밟았다. 부드럽게 거품이 묻은 시트자락이 발에 감겼다. 혜은은 힘을 주어 꾹꾹 눌렀다. 그의 친절함에, 그의 한결같음에 혜은은 항상 도망가고만 싶었다. 그가 기다려줄 거니까. 그가 데리러 올 거니까. 다시 돌아가기 위해 혜은은 그에게서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혜은은 샤워기로 물을 뿌리며 이불을 헹구어냈다. 맑은 물을 부으면서 혜은은 발로 밟고 또 밟았다. 내가 다시 올 거라는 걸 몰랐던 거야? 모르고서 나를 기다린 거야? 나는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마음에서 벗어났던 적이 없는데. 혜은은 시트자락을 세탁기로 가져갔다. 물을 품은 시트자락이 무거워 혜은에게 버거웠다. 거실에 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혜은의 옷도 모두 젖었다. 혜은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숱한 물음들 속에서 하나의 답도 찾아내지 못하는 혜은은 무력감을 느꼈다. 세탁기에 넣고 탈수 버튼을 누르자 동그란 창 안으로 시트자락이 휘감기며 움직였다. 엉엉 울며 발을 구르던 그의 모습. 그에겐 작았던 의자. 황량한 벌판. 그는, 외로워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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