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화) 눈길을 끄는 뉴스가 하나 있었다. 공지영이 중앙일보에 새롭게 연재할 소설 「즐거운 우리 집」에 대해 그의 전남편이 가처분신청을 냈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문학의 공공성과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두고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정작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됐던 것은 공지영이 갖고 있는 세 번의 이혼경력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지영이 전하고자 하는 새로운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직 우리 사회가 새로운 의미의 가족을 받아들일 자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공지영의 전 남편이 누구이며, 그의 결혼이 파경을 맞게 된 이유 등에 대한 관심만 증폭되고 있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공지영의 가족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명인사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중들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늘 파파라치가 따르는 헐리웃 스타가 아닐지라도 공지영은 현재 한국 문학계에서 대중 호응도가 높은 작가 중 하나다. 게다가 세 번의 이혼 경력을 가진 이혼녀치고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혼녀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공지영의 이혼 경력은 명함을 내밀 것도 못 된다. 사람들이 실제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특수한 가족 형태에 대한 호기심일지 모른다. 성(姓)이 모두 다른 아이 셋과 그들의 싱글 맘(Single Mom)으로 구성된 특수한 가족 형태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정상 가족’ 범주를 벗어난 이들 가족에 대해 노이로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상’이란 단어가 주는 쾌감을 즐기는 사람들. 정상의 범주에 들고 싶은 만큼 비정상에 대해선 가혹하다. 하지만 이혼율이 세계 2위인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의 생각처럼 ‘정상’적인 가족이 많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비혈연가구와 1인가구 비율이 1985년에 8.56%이던 것이 2005년에는 21.37%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어느새 ‘정상’ 가족을 고집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상황에 이르렀다. 해외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에 대한 수용도가 높아졌다. 체면 때문에 혁명조차 무혈(無血)로 이뤄낸 영국도 80년대 이후로 사실혼 관계에 기초한 가족에게도 복지 혜택을 동등하게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스웨덴에서는 동거도 전형적인 가족 형태로 인정해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편부모 가정에 대한 지원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영국·스웨덴 등에서는 편부모 가정에 대해 별도의 가족 수당을 지급한다. 프랑스·스웨덴 등 여타 유럽 국가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국가에서는 여성 세대주 가족에 대한 복지 정책은 복지 국가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의 정책 이슈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비정상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다. 정상적이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팔자의 기구함을 원망하는 것이 고작이다. 공지영은 “그 가족이 남들의 기준으로 보면 뒤틀리고 부서진 것이라 하더라도,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가족”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가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핏줄을 운운하면서 우리는 남보다 못한 짓을 하는 가족을 충분히 봐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피보다 진한 것은 사랑이 아닐까.

 

영화 「가족의 탄생」이 시사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소녀 같은 누나와 철없는 남동생, 그의 20살 연상의 연인이자 시어머니 뻘의 올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딸까지 영화 어디에도 ‘정상’적인 모습은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어느 가족 못지않은 사랑의 따뜻함이 자리 잡고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속에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랑’ 말이다.

 

가족에 대해 ‘정상’과 ‘비정상’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사랑과 정이 있으면 그 모두가 가족이다.

 

공예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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