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d는 그것이 당신이라고 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잊는 것도 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사랑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불가능했다고 했다. 마지막이라고 사정해서 나온 자리였다. 단정하고 평범한 카페. 2층이라 창밖의 나무가 눈 앞에서 가지를 흔들었다. 짙은 갈색으로 물든 낙엽이 마지막 남은 찬란함을 다하며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진은 d를 바라보지 않으려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었어요.”

d의 목소리엔 여전히 물기가 서려있었다. 커피의 쓴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아진씨를 사랑하면 내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다고요. 그렇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면 나만 상처받을 거란 거 알고 있었어요."

d가 잔을 내려놓으면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잠시의 침묵을 메웠다.

"그런데 그만 당신이, 그런 당신이 불쌍해져버렸어.”

“너, 지금 나를 동정하니?”

아진은 d를 노려보았다. d가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래요. 연민이 들었어요. 너무 안 돼 보였다고요. 당신,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날을 세우고 있는 당신이 불쌍했어요. 그렇게 마음을 닫아버린 당신 너무 외로워보여서 내가 옆에 있어주고 싶었어요.”

d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끝내 칼을 품고 있군요. 도대체 누가 당신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건 복수가 아니에요. 그렇게 당신만 파괴하는 건 복수가 아니에요. 당신이 칼을 품고 있으면 당신만 다쳐요.”

d는 고개를 숙이고 긴 숨을 내뱉었다.

“이제 그만 내게 돌아오면 안 돼요? 당신이 그렇게 차갑게 마음을 닫고 있어도, 평생을 그렇게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해도, 나 당신 외롭지 않게 곁에만 있을게요. 당신이 더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줄게요. 그렇게 아파하는 당신을 보고도 나 모른 척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제발…”

d는 눈물을 떨구었다. 탁자 위로 깍지 낀 두 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착각하는 거 아니니? 주제넘게. 나를 지킨다고? 너 나한테 필요 없어. 나는 너에게 가지 않아. 네 말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d가 고개를 들었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

“당신이 그렇다 해도 나는 내 사랑을 지킬 거예요. 당신은 틀렸으니까. 나는 당신과 섹스하는 것만으로,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것만으로, 만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외로운 건 도리어 당신이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내 외로움을 채워달라는 것도, 나와 섹스해달란 것도 아니었는데…”

잠시 아진을 바라보던 d는 천천히 일어서서 몸을 돌려 나갔다. d가 남기고 간 커피향이 흐릿하게 아진에게 전해져왔다.

“당신은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는군요.”

d가 뒷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아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얼마 남지 않은 잎사귀마저 모두 떨구고 있었다. 아진은 잠시 현기증에 눈을 감았다 떴다. 창문으로 손을 뻗어 창문가에 어린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사랑을 받을 줄도, 사랑을 할 줄도 모르는 여자가 아진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22.



여자는 작업실에 있었다. 며칠째 작업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혜은은 작은 소리에도 거실로 나가 여자를 확인했다. 작업실 문은 닫혀있었다. 테레빈유 냄새가 문틈으로 스며 나왔다. 오늘에서는 문틈으로 새어나온 냄새가 혜은의 방에까지 옮겨왔다. 저 안에서 여자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혜은은 불안한 시선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다신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닫힌 문은 굳건했다. 혜은은 여자의 닫힌 문을 보며 그의 손을 떠올렸다. 따뜻했지만 절망하고 있는 손을. 문을 닫던 조용하고 긴 손을. 습관처럼 굳어버린 슬픔을.

혜은은 화가 나면 밥을 먹다말고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사소하게 말이 부딪혀도 혜은은 습관처럼 화를 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혜은의 화를 들어주고 있으면 혜은은 혼자서 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혜은은 화난 감정을 키우곤 했다. 얼마 후 그는 슬리퍼를 신고 나와 혜은이 열어놓고 나간 대문을 닫는다. 문을 닫는 조용하고 기름한 손. 그 손의 절망을 놓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혜은은 짐짓 마음이 풀려 입을 뾰족하게 만들고 양은대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간다. 그러면 그가 혜은을 보고 절망이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웃는다. 그리고 기름한 손을 뻗어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손을 뻗어 혜은을 안아주는 것이다.

그의 손. 습관처럼 슬픔에 잠기던 손.



혜은은 시장에 다녀왔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생닭은 크림색으로 윤기가 돌았다. 오돌토돌한 피부에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혜은은 한눈에 그것을 골라잡았다. 닭을 받아든 혜은은 골목을 다니며 좋은 재료들을 골랐다. 가까이서 바라보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조심스레 봉투에 담았다. 한 아름 장을 본 혜은의 발걸음이 손에 들린 무게만큼 가벼워졌다. 찹쌀을 씻는 손에 닿는 물이 신선했다. 밤을 까는 날렵한 칼날을 혜은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대추를 씻어서 물기를 털어냈다. 마늘과 생강을 손질했다. 양파와 대파를 썰었다. 맵싸한 맛이 혜은의 손에 닿았다. 닭의 뱃속에 찹쌀과 마늘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혜은은 살짝 미소 지었다. 꼬챙이를 꿰는 손이 바지런하고 익숙했다. 가는 손으로 도마 위의 재료들을 모아 냄비에 담았다. 찰박하는 작은 일렁임이 일었다. 불을 조절하며 끓이는 동안 혜은은 바에 앉아서 여자의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삼계탕이 익어가는 노란 냄새를 맡으며 혜은은 잠시 누군가에 대해 생각했다. 테레빈유 냄새가 조금씩 가시고 있었다. 여자의 방 안으로 폭신한 냄새가 전해질까? 혜은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닭은 조금씩 고집을 버리고 흐물해져가고 있었다.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혜은은 문을 열고도 문고리를 계속 잡고 있었다. 여자는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다. 잎사귀에 정교한 날을 세우고 있는 꽃. 여자는 가느다란 붓을 들고 있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혜은의 손에 땀이 배었다. 혜은은 마른 침을 삼켰다. 여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식사를 같이 할까 해서요.”

“생각 없어요.”

“선물이에요.”

느리게 감는 테이프처럼 여자가 몸을 돌렸다. 메마른 시선에 표정은 없었다. 혜은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았다.

“그때 말했었잖아요. 선물하고 싶다고…”

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짧고 진득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밖으로 나와요. 먹지 않더라도 좋으니까. 여기는 냄새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프네요.”

혜은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먼저 뒤돌아 문을 활짝 열고 성큼성큼 주방으로 걸어갔다. 혜은은 부러 소리 내며 상을 차렸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탕탕거리며 놓은 혜은이 고개를 들자 여자가 식탁 의자를 빼내 앉았다. 여자는 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선물은 이거에요. 내가 제일 잘 하는 거.”

혜은은 먹음직스럽게 삼계탕을 담은 그릇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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