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소설 에서 70세의 보르헤스는 어떤 신비로운 꿈과도 같은 상황에서 19세의 젊은 청년인 보르헤스,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 기억의 단편들이 그 청년이 보르헤스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지만, 이 두 개인은 결코 같지 않음이 드러난다. “반세기의 시간이 그저 쓸모없이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이런저런 책과 다양한 취미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우리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 비슷했으면서도 너무 달랐다.”
대학이라는 공간에 머물면서, 나는 자주 나의 20대의 흔적들과 마주친다. 며칠 밤을 괴롭히던 고민의 구체적인 내용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수많은 물음들도 이제는 희미해졌다. 20년 전의 내가 20년 후에는 지금과 같이 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혼탁한 불안과 그 불확실한 선택들을 피할 수 있었을까? 더 편하고, 더 여유롭게 젊은 시절의 다양한 가능성을 맘껏 누릴 수 있었을까?
시간은 한 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사회와 의식, 환경도 변화시킨다. 대학이란 공간은 늘 새로운 20대의 성원들로 순환되지만, 그들은 늘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나는 내가 만나는 학생들에게 노년의 보르헤스가 청년 보르헤스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안타까움과 연민, 애정을 느끼고 있지만, 현재 그들을 가장 괴롭히는 고민이나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가장 큰 관심거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적절한 조언이나 적합한 충고를 하는 일에도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를 연출하기도 했다는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의 영화 는 기자가 되기를 꿈꾸는 한 젊은 여성이 겪는 혹독한 첫 직장 경험을 보여준다. 경력에 도움이 되리라는 절박한 믿음 하나 밖에는 다른 희망이나 지지도 없이, 앤드리아라는 그 여성은 ‘악마’와도 같은 여성 상사의 차갑고 서슬 퍼런, 납득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명령과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던 일,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일과 멀어지면서도 ‘두 번째 비서’ 앤드리아는 화려한 패션 잡지의 유능한 편집장인 상사가 보여주는 새로운 세계의 절대적인 힘에 매혹된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 않는 젊음은 자신의 선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앤드리아는 ‘프라다를 입는 악마’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 다시 새로운 출발로 되돌아온다.
전 세계의 수많은 2,30대 여성들을 독자로 만들었다는 로렌 와이스버거의 원작 소설을 나는 읽어보지 못했다. 이 소설과 같이 2,30대 여성 독자를 겨냥한 영미 대중소설을 지칭한다는 ‘칙릿(chick-lit)'이라는 신조어도 낯설다. 그래도 내가 이 영화를 유쾌하게 본 이유는, 지금의 20대 여성들은 ’악마‘가 되지 않고도 일하고 인정받으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성공적인 전문인으로써의 삶은 꿈꾸는 많은 학생들은 거의 동일한 노력들을 한다. 같은 능력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쟁은 치열하다. 좋은 학점과 높은 외국어 인증시험 점수, 외모와 태도에 있어서의 전형성까지. 그러나 앤드리아가 그 자리를 노리는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고용되었던 이유는 그녀의 ‘다른 젼에 있었다. 어떤 종류의 인정은 이런 틈새에서 생겨난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을 목숨을 걸고 완수하면서, “나는 이 일을 사랑해”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젊은 여성들에게 ‘성공’은 무엇일까? 영화에서의 두 번의 반전은 앤드리아가 자신이 하는 일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부분과 그 노력이 자신의 꿈과 불일치하는 것을 깨닫듯 발견하는 부분, 그 두 자리에 있다.
나는 여전히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학생들이 성공적인 전문인으로써의 삶을 꿈꾸면서 어떤 종류의 시행착오를 겪게 되리라는 생각. ‘성공’에 대한 하나의 전형에 머물러 다양한 가능성과 진정한 자신의 힘을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20대에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쉽게 포기하고, ‘자신의 고유한 관심과 능력’을 가꾸기보다 동일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너무 빨리 ‘현실적’이 되는 것은 아닌지하는 걱정.
나도 여전히 20년 후의 내 모습을 안다면 현재의 내 삶이 더 여유 있을지를 묻는다. 그러나 한 가지 20년 전보다는 더 잘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택이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아니며 늘 불확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의 날카로움과 흡인력, 집중력이 초조함이나 조급함이 아닌, 불확실한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김애령 교수(철학 전공)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