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클어진 머리를 삐죽삐죽 세우고 당당히 TV에 등장하는 그. 차림새 역시 집에서 쉬다 나온 듯 편안하다. 누구에게나 반말투로 질문을 툭툭 던진다.
목요일 밤 10시 KBS1 에서 화가 김점선(시청각교육학과·68년 졸)을 만나 볼 수 있다. 그는 ‘김점선이 간다’ 코너에서 명사들을 인터뷰한다. 프로그램을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와!’하는 탄성을 지르며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의 모습은 도대체가 ‘방송용’이 아닌 것이다. 무뚝뚝한 나래이션 역시 ‘이금희식 부드러움’에 물들어 있던 시청자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틀을 깨는 신선함이 있기에 그의 코너는 사랑받는다.
김점선은 단순한 형태·강렬한 색채로 자연을 표현하는 화가다. 소설가 박완서는 그의 그림에 대해 “대상이 풍기는 위선을 걷어내고 본질을 포착하기 때문에 사실보다 더 사실답다”고 말한다. 환갑을 넘긴 그는 요즘 대학생들보다 포토샵을 더 잘 다룬다. 5년 전 찾아온 오십견 때문에 대부분의 그림 작업을 컴퓨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은 컴퓨터를 못한다는 고정관념에 그는 당당하게 항변한다. “MSN 메신저랑 싸이월드는 재미없어서 관둔지 오런라고. 김 화백은 기계를 두려워하지 않기까지 대학교육의 공이 크다고 했다. “지금도 사용하는 프로젝터 등의 기계를 수업 시간에 다뤄봤지. 시험은 기계를 제대로 조작할 수 있는지 평가하는 것이었어. 기계에 대한 열린 마음이 이 때 생겼지.”
그는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일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학시절의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이 빨라진다. 그야말로 열변을 토한다. 그만큼 학창시절은 그에게 소중하다.??
대학에 들어온 그는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나에겐 스승이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책을 열심히 읽었지. 공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가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빼놓지 않고 읽었어. 재미 없어도 꾹 참았어. 괜히 이상한 학파에 빠져서 인생 망치면 안 되니까.”
외국 책에 중국·일본만 언급되고 대한민국이 없다는 것이 화가 나 영어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다. “외국에 우리 문화를 알리려면 먼저 그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강 때마다 랩실에 가서 원어민 발음을 듣고 따라했다. 교양 국어책 이외에 한글로 된 책은 읽지 않았다. 영어책만 읽었다. 밤에는 AFKN을 틀어놓고 잤다. 대학 4년을 그렇게 살았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본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두 번째 학기에 제적당하고 말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필수과목의 수강신청을 거부해서다. 제적 후 김점선은 통역사로 3년간 일했다. 그의 영어 실력을 눈여겨 봤던 외국인 교수가 일자리를 소개했다. 그러나 창작 활동 없는 직업을 견디지 못했다.
통역사를 그만둔 그는 1972년 홍익대학교 미술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에 들어가기도 전에 논문 주제를 뭉크로 정해놓고 노르웨이에 책을 주문했다. 6개월이 걸려 도착한 책들을 집에다 쌓아놓고 입학을 기다렸다. 밤낮으로 그림을 그렸다. 결국 입학한 해 그는 백남준·이우환이 심사위원을 맡은 미술전인 앙데팡당(Independent)에 한국 대표로 뽑힌다. 그 이후 지금껏 직업 화가로 살아오고 있다.
충분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았음에도 사회는 그를 ‘별종’으로만 취급했다. 인정받기까지 오랜 무명시절을 거쳤다. 그는 자신의 책 「김점선 스타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량복장이라고 붙잡아다가 구치소에 가두던 사회가 나를 불러 일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불량인간으로 취급받던 인간을 풀 샷으로 보여주겠다는 세상을 그냥 무심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상도 그렇게 변하는구나 하면서.”
그는 ‘틀린’ 사람이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일 뿐이다. 때 묻은 시선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화가 김점선. ‘똘레랑스’가 부족하던 사회에서 투쟁해온 화가 김점선. 그는 천재·괴짜라는 말보다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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