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노노3인방이요?” “아니, NO老3인방~ 늙기 싫다는 뜻이야. 허허허”
이화동산에서 30여 년 세월을 교직원으로 보낸 김형두(63)·김문갑(64)·조관휘(64) 세 명은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하다.

이들은 70년대부터 꾸준히 등산으로 체력을 기르고 친목을 다졌다. 10여년 전 시작된 ‘이화산우회’라는 교직원 등산동호회 초기 멤버이기도 하다. 등산으로 맺어진 인연은 퇴직 후에도 이어졌다. 현재는 11명으로 구성된 퇴직원들의 산행모임, ‘화백산우회’의 멤버다. 산행을 하다 “어이~ 화백들 이쪽으로 모여.”라고 하면 주위에서는 ‘그림 그리는 화백님’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화백은 ‘화려한 백수’의 약자다.

퇴직 후 여유를 만끽하던 이들은 더 늙기 전에 우리나라를 걸어서 가보자는 생각으로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부터 통일전망대까지 국토종주를 계획했다. 5월8일(월)∼6월10일(토) 34일간의 일정동안 900여 Km를 걸은, 이름하야 ‘아름다운 동행’이다.
처음엔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앞섰다. 혹시 마음이 약해져 중도에 포기할까봐 주변에 온통 소문을 냈다. 인터넷 까페(cafe.daum.net/nono3men)까지 만들었다. 여행 10일 전에 종주구간·종주기간·여행목적·예산 등 꼼꼼하게 적은 여행개요를 업데이트하면서 사전준비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번 종주를 위해 세 명은 각각 역할분담을 했다. 김문갑(63)씨는 일명 ‘노상상무’였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성가신 일을 다 맡는 것. 길을 물어본다거나, 숙박장소에서 빨래할 곳을 물어보는 일이 그가 매일 처리한 일들이다. 조관휘(64)씨는 ‘재무담당’. 모든 경비는 조씨 손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김형두(63)씨는 마치 ‘종군기자’같았다. 종주 시작 전 계획서를 작성하고 주변에 광고를 하는 것, 종주 기간 내내 매일 빠짐없이 까페에 사진을 찍어 올리고 일지를 작성한 것이 그의 일이다. “아주 시골에서는 PC방이 없어서 애를 먹은 적도 있었죠. 파출소 컴퓨터를 빌려 일지를 쓴 적도 있어요.”

이들의 도보는 매일 새벽 6시경 시작됐다. 김형두씨가 밤12시가 넘도록 사진과 글을 올리느라 모니터 앞에서 씨름하다 보니 옆에서 지켜보던 조관휘씨와 김문갑씨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러다 지쳐서 종주를 못하게 되면 어쩌나 원망스럽기도 했죠.”

그러나 김형두씨의 노력이 없었으면 마치 한편의 여행기를 읽는 듯이 생생한 34일의 흔적은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까페 ‘국토종주기’ 게시판에는 그의 맛깔스러운 글과 사진이 읽는 재미를 쏠쏠하게 한다. 매일 이들의 글을 읽고 응원을 해준 교직원 후배들과 가족들의 댓글도 눈에 띈다. 종주 초기에 조관희씨의 딸이 작성한 ‘얼마나 힘드셨을까 지금 두 손 남쪽으로 뻗고 안마동작 들어갑니다. 3men아버지들 힘내세요’라는 댓글이 인상적이다.

등산으로 길들여진 몸이라 해도 하루 30여km를 걷는 일정은 녹록지 않았다. 매일 물집이 아물 새도 없이 걷다 보니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여러 번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9일째쯤 됐을까, ‘주간조선’기자가 취재차 이들을 만나러 내려왔다. “사진촬영도 멋지게 하고 나니 그때부터는 책임감·의무감이 생겨서 힘들어도 그만두질 못하더라고요.” 중간중간 걸려오는 응원전화와 서울에서부터 내려와 함께 걷는 후배들 덕분에 출발한지 34일만에 무사히 종주를 마칠 수 있었다.

3kg~5kg까지 몸무게가 빠지고 발은 상처 투성이인데다 얼굴에는 미처 깎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했다. 그러나 함께 의지한 동료들, 그리고 후배들의 사랑을 느낀 ‘아름다운 동행’의 ‘아름다운 종주’였다.

오랜만에 이화동산을 찾아 여행기를 풀어놓는 이들의 얼굴엔 미소가 넘쳤다. 처음 왔을 때는 여자만 많아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했다는 이화동산이 어느새 인생의 반을 보낸 제2의 고향이 됐다. 7·80년대 학생들의 시위부터 학교변화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산 증인 NO老3인방, 앞으로도 영원히 늙지 않을 영원한‘이화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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