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침이 막 시작되려는 새벽녘이었다.


아진은 아진은 신문지를 접어 유화물감을 짰다. Bunt Umber. 짙은 갈색이다. 색을 띠고 있더라도 무채색처럼 무게감을 가지는 색을 아진은 잘 쓰지 않는다. 화사한 색을 주로 쓰는 아진의 물감통에는 배경을 칠하는 검은색을 제외하고는 어두운 색의 물감을 대부분 새것으로 남는다. 아진은 신문지 위에 물감을 듬뿍 짰다. 테레빈유와 아마인유를 반씩 섞어서 접시에 담고 붓을 적시었다. 단단하게 굳어있던 붓이 조금씩 부드럽게 움직이며 물감을 기다린다. 물감에서 아직 기름기가 덜 빠졌지만 아진은 그대로 붓을 물감에 묻혔다. 살짝 수건에 붓을 묻혀 기름기를 제거한 후 짙은 갈색이 잔뜩 묻은 붓을 들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난초. 짙은 갈색의 난초를 그리며 가느다란 이파리에 이르러서는 아진은 여자를 떠올렸다. 여자의 낡은 뒷모습이 생명을 모두 잃어버린 듯 아슬아슬 지탱하는 그것과 닮아있었다. 생기와 표정을 잃어버린 뒷모습. 아진은 붓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조용히 여문 난초의 꽃망울을 그렸다. 아진은 자신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에게서 뒤돌아섰을 때 자신은 반짝이는 귀걸이만큼 화려한 뒷모습이었을까. 뒷모습이 초라함을 드러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시 연락한다는 그의 마지막 말의 끈적끈적한 질감을 떠올리며 아진은 물감을 거칠게 발랐다.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난초는 벽면을 채웠다. 기진맥진해진 아진은 난초가 그려진 부분보다 난초가 남겨놓은 여백을 바라보았다. 우두커니 혼자 벽에 그려진 난초. 외로운 갈색. 빛이 바랜 옛 사진처럼 아득하고 먼. 아진은 고개를 들어 밤색으로 영근 난초의 꽃잎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힘들게 꽃을 피운다는 난초는 오랜 기다림에 비해 작고 수줍은 꽃망울을 틔운다. 난초를 길러본 적이 없는 아진은 오늘 하루 자신이 길러낸 난초가 꽃을 틔우고서야 그리 싱싱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번의 전화벨이 울리고 지석이 전화를 받았다.
“이게 누구야? 너 전화 안 된다고 y가 나한테까지 전화를 했던데.”
과장되게 소란스런 목소리가 시끄러운 주변의 소음과 뒤섞여 있었다.
“바쁘면 나중에 전화해도 돼요.”
아냐, 이제 괜찮아, 지석은 경쾌한 목소리를 내었다.
“너 그림 또 다 팔렸다며. 대단해 정말. 이러다 웨이팅 리스트 생기는 거 아냐?”
운전을 하면서 통화하는 듯 목소리가 밀폐된 공기의 탄력을 받아 울렸다.
“그때 못한 인터뷰를 하려고 연락 드렸어요. 지금 인터뷰 부탁하긴 늦은 건가요?”
“아니, 뭐 늦고 말고 할 게 있나.”
“다행이네요. 그때는 갑자기 자리에서 나와서 죄송했어요.”

아진은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곧고 바른 목소리를 내야한다. 아진은 목소리에 보다 여유를 실어서 말을 이었다. 초라한 뒷모습으로 기억될 수는 없다.
“이번에는 제가 좋은 곳에서 식사를 대접하죠. 제대로 인터뷰해주세요.”
그는 호탕하게 웃고 그러자고 했다.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미룰 것 있어? 내일로 바로 약속을 잡지.”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아진은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까지 정중한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서아진, 꽤 하는데.”
전화가 끊어진 신호음을 들으며 아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14.


납골당은 숲 안에 들어서 있었다.


혜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원이라 이름 붙여놓은 것처럼 쾌적하고 아늑했다. 도시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듯 했다. 희뿌연 공기가 걷히고 선명하게 드러난 곳에 건물이 서있었다. 파란 하늘과 녹색 숲, 하얀 건물. 어린이가 그려놓은 수채화처럼 산뜻하고 밝았다. 깨끗하고 반듯한 건물. 하얀 화강암이 가을햇빛에 부서지고 있었다. 음침하게 그늘진 납골당을 상상하던 혜은은 현대식건물에 오래도록 시선을 두었다.


그는 천국홀에 안치되어 있다고 했다. 복도는 건물의 외관만큼이나 깨끗하게 반질거렸다. 윤이 나는 복도의 벽을 혜은은 손으로 쓸어보았다. 차가운 냉기에 섬뜩 놀라 손을 떼었다. 천국도 이렇게 티끌하나 없이 반짝거릴까. 하지만 손댈 수 없게 차가울까. 그가 머무는 곳은 언제나 온기로 가득했는데. 이렇게 차갑고 윤기가 도는 곳은 아니었는데. 혜은은 중얼거렸다.


꽃.


그가 안치된 곳으로 들어서자 화사한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을 담고 있는 곳이 이렇게나 밝고 화사한 색으로 되어있다니. 납골당에 오기 전 혜은이 두려워했던 신산한 느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전면이 유리로 된 추모단은 색색의 꽃으로 장식되어 그 안에 사진과 유골함을 담고 있었다.


무릎을 구부리고 손을 더듬다가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사진은 들어있지 않았다. 공기가 묘하게 뒤틀렸다. 하얀 항아리에 쓰여진 그의 이름. 혜은은 숨을 쉬기가 거북했다. 공기가 짙은 푸른색을 띠며 침잠하고 있었다. 푸른 공기 사이로 붉은 가루가 스며들어 혜은을 감싸고돌았다.


혜은은 가만히 손을 들어 유리창을 만졌다. 이 안에 한줌의 잔흔으로 그가 웅크리고 있었다.
“미안해.”
혜은이 그에게 손을 얹고 말했다.
“곧, 갈게. 너무 늦어서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
유리창을 다시 한 번 만지고 혜은은 몸을 일으켜 납골당을 빠져나왔다.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과 곳곳의 꽃들이 혜은의 시선에 툭툭 걸렸다. 혜은은 동요하지 않으려 앞만 보고 걸었다.


걸어 나오는 혜은을 목소리 하나가 부여잡았다. 필사적인 목소리가 화장터와 납골당을 둘러싼 푸른 공기를 깨트리려 멀리서 침묵의 겹을 헤집고 나왔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비명에 가까운 절박한 소리로 혜은을 불렀다. 그 비명이 너무 작아서 혜은에게 와 닿기도 전에 부스러지고 말았다. 혜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부들거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이유 없이 흘러나오는 울음을 주먹으로 훔치며 혜은은 버스정류장에 섰다. 눈이 쓰라릴 정도로 눈물이 터져 나와서 마구 흐르고 있었다.


혜은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가 있었다. 입구까지 따라 나와 기둥에 기대서서 울고 있었다. 혜은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혜은은 눈물을 훔치며 저만치 떨어져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린애처럼 울지 마, 미안해, 미안해.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