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금) 고대 문과대 교수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인문학 선언’을 발표한데 이어, 19일(화) 본교 인문학과 교수들도 ‘인문학 위기’를 선언할 예정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1998년 인문학과장들의 모임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의제로 설정되면서 논의는 꾸준히 이뤄졌다.
그렇다면 산발적으로 제기돼 오던 ‘인문학의 위기’를 공식적으로 집단선언 한 이유와 의미는 무엇일까.
선언 이후 수많은 언론과 학계는 인문학을 집중 조명 하며‘위기다’·‘아니다’를 두고 열띤 토론 중이다.
‘인문학 위기’의 공동 선언, 위기를 기회삼아 제자리를 찾으려는 인문학자들의 노력으로 해석되지만 지나치게 외부로 눈을 돌려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위기의 본질에 대해 반문하고 싶다.

문과대학 교수들은 국가의 개입과 무차별적인 시장경쟁을 근거로 들어 인문학의 위기라 판단한다. 이른바 ‘돈 안되는’ 학문으로 인식되면서 학생들과 사회로 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것.

교육부가 학부제를 도입하면서 ‘학과 선택권’은 순전히 학생들에게 돌아갔다. 완전 시장경쟁 상태로 접어든 것이다. 평등이 강조되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중시되는 시장경쟁이 도입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이다.

그러나 인문학자들은 같은 출발선상에서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 연구에 대한 BK21 사업단의 지원만 보더라도 과학기술 분야의 8분의 1에 불과하다. 교육부의 전체 연구지원비용 중 인문학이 차지하는 비용은 0.7%다.

취업 시 인문대 생이 겪는 불이익도 인문학을 위기로 몰았다고 주장한다. 기업은 실용학문 전공생을 우선으로 ‘21세기 융통성 있는 인간상’을 우대 채용하고 있다. ‘인문학과 출신들을 어디에 쓰겠냐’는 인식도 기업들 사이에 공공연히 퍼져있다. 사범대 졸업생들과 교직을 놓고 경쟁하기에도 불리하다. 인문대 학생들에게 만만한 것이란 없다.

그러나 내부원인을 다잡고 자성하는 태도가 선행돼야 한다.

50년의 발전역사를 거듭한 인문학이 아직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뿌리 깊은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인문학자들은 지나치게 ‘시대변화에 따른 구조조정’을 침묵해 왔다. 민주주의의 시장논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학문의 발전 방향을 새롭게 조정할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인문학이 가지고 있는 엄숙주의와 권위주의가 인문학의 전통을 이어가기보다는 대중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인문학의 인력들이 다양해져야 한다. 인문학 연구가 대중과 소통할 의무는 없지만 대중과 소통할 인력이 나올 수 있도록 학계 분위기가 개선될 필요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지나친 순수주의를 지적하고 있다. 지금의 사태를 초래한 주범으로 꼽기도 한다. 인문학을 시장에 내놓을 가공업자와 유통업자를 경시하는 분위기는 시장에 나온 인문학의 위치를 불분명하게 한다.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순수주의 연구자만을 우대하지는 풍토도 한 몫 한다. 인문학내에서의 자성이 없는 한 외부요인의 개선만으로 인문학의 존립을 보장받기는 어렵다.

인문학 안에서의 역할분담도 중요하지만 각 대학별로의 특성화도 필요하다. 순수 인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대학은 연구중심으로, 인문학의 가공에 주력하고자 하는 대학은 대중과의 소통에 초점을 맞춰 발전하면 된다. 지금의 대학들은 모두 같은 분야에 중복투자를 하고 있다.

최근 흥행한 영화 괴물은 돌연변이 생물체가 탄생하면서 인간을 향한 무차별적 살인을 담고 있다. 괴물은 철학도 가치관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리도 없다. 인문학이 부재된 상태에서 미래사회가 도래하면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이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내부요인과 외부요인을 따지기에 앞서 이 같은 일을 방지하는 것이 인문학적 소양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위기의 본질에 대한 입장은 같은 인문학자들 사이에서도 갈리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문학이 경시됐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비인간적인 삶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당장 눈앞의 성과는 만족할 수준이 아니더라도 모든 학문과 교육의 토대라는 사실을 시장의 소비자들은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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