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몰랐던 무수한 것들 중 ‘캠퍼스 안의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우선 “선생님들은 우리가 선생님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큼 학생들 얘기를 많이 한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들은 서로 무심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강의시간 어떤 대목에서 형형한 눈빛들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는지 관심을 나누어 가졌던 거다. 지금 보면 학생/선생의 구분은 단지 기능적일 것일 뿐인데, 그때는 서로 다른 세계의 성원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방과 후, 정문 한 켠의 새 공간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본다. 혼자 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 레인씩 차지하고 함께 뛰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거꾸로 도는 소수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운동장 가장자리의 배수 통로를 뛰는 사람들도 있다. 뛰는 듯 걷는 사람, 오래 도는 사람, 금방 쉬는 사람, 서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관찰한다. 그들은 구체적 위치성이 다르지만 땅을 밟으며 도는 자로서의 정체성은 동일 지형 안에 있다. 그러니 선생님들은 시시콜콜하게 ‘어떤 학생은 이렇고 어떤 학생은 저렇다’를 한담의 소재 삼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옆에서 돌고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어떻게’ ‘무엇 때문에 도는갗를 소통하고자 했다.

둘째로, “선생님들은 우리들이 성장시킨다.” 이제야 절감하지만 우리가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것이 일생의 기쁨이 되듯 좋은 학생을 만나는 것 역시 교사의 행운이다. 아직 뭘 모르는 우리는 때로는 당돌하게 또 때로는 대안 없이도 물어대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이 운동장에 와서 돌 수 없나요?” “이렇게 돌고만 있는 것은 자기만족적 삶 아닌가요?” “선생님은 나름대로 열심히 돌고 계시지만 앞으로의 비전은 뭔가요?” 때로는 현실에 대한 항의와 문제제기로, 당신들이 채택하고 있는 이론의 패러다임 비판으로 이어졌던 질문들에 대해 선생님들은 전문 지식인이 괘념할 바가 아니라고 선을 긋지 않았다. 그들에게 좋은 학생이란 학문적으로 잘 정식화된 틀이 아니더라도 순수한 만큼 거친 도전 속에서 선생님을 긴장시키고 성찰의 계기를 주는 존재들이다. 선배 선생님들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진리의 상품화를 정당화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 덕분이었다고 고백한다.

이 풍경들을 새삼스레 반추해 보는 것은 어떤 징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학 사회의 조로(早老)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과거에는 문화적이고 의식적인 지향성에 따라 준거체계의 다양성이 있었고 세대차는 그 표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노후에 대한 걱정이나 내가 몇(십) 년 후에 어떤 일을 어떤 의미부여 속에서 하게 될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성과 불안감이 거의 모든 세대를 덮고 있다. 이렇게 마음들이 오그라들어 협소해진 캠퍼스 안에 사회적 소수자와의 연대적 삶이나 패권적 자본주의의 작동에 균열을 낼 대안적 가치를 지향하는 삶에 대한 구상력이 들어설 여지가 남아 있을까?

소크라테스로 돌아가 보자. 코라 메이손이 극화한 소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석공 아버지는 “사자 상을 조각하려면 돌 속에서 사자를 봐야 한다. 마치 돌의 표면 위에 사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야 하고, 그 다음엔 사자를 풀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산파였던 그의 어머니는 “산파로서 난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단지 아이를 풀어놓고 자유롭게 해줄 뿐”이라고 말했단다. 소크라테스는 이 비전과 해방적 실천을 종합해 이상세계의 관념들이 제 자리를 잡도록 풀어놓는 역할을 했다.

이 틀에서 보면 여성주의자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가 질러놓은 억압의 빗장을 풀어헤치는 사람이고, 생태주의자는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사람이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마음에 생긴 매듭을 스스로 풀어헤쳐 정리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걷고 돌고 또 뛰는 수고 속에서 잘 깎여진 몸이 있듯이 잘 정련된 마음도 있을 것이다. 몸은 감각으로 포착되기 때문에 쉽게 구분되고 개별화되지만 마음은 비가시적 불투명성으로 인해 식별하기 쉽지 않고 성숙의 표도 쉽게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과 학생이 서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특히나 젊은 세대는 미래를 담지 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드는 일이 고유의 정체성일 수 있음을 성찰할 때 캠퍼스는 희망의 씨를 뿌리는 하나의 의미론적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이 타성과 관성적 현상유지에 묶여 있지 않아야 학문과 사상의 자유도가 증가한다. 책상 서랍 정리하듯 가치 있는 것만 간직하고 나머지는 버려야 대안적 사유가 고일 여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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