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기냐르「은밀한 생」을 읽고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제목만큼이나 은밀하게 하얗고 은밀하게 두꺼운 책은 은밀한 매혹으로 마음에 와 닿았었다. ‘은밀한 생’은 어떤 책보다도 이화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부담감과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읽어보면 압네다”라고 한마디 던지고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어쩌면 ‘은밀한 생’의 가장 좋은 서평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좀 소개할라치면 사람들은 언제나 묻는다. “그래서 줄거리가 뭔데?” 이 책을 그 질문에 맞춰 답한다면 작가로 짐작되는 한 남자가 이젠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한 여인과의 사랑을 기억하는 내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말하기에는 미심쩍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사랑의 기억들 사이에는 사랑에 대한 작가의 웅숭깊은 단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온전한 사랑을 위한 ‘침묵’을 말하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사유 작업이 새겨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니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닌 동시에 소설이며 철학적 에세이기도 하다.

작가는 말한다. “사회는 사랑을 거부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결혼, 즉 통제와 번식이며 그러한 목적성을 배제한 순수한 사랑은 그것들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집단의 약속이며 집단으로 형성된 사회의 것이다. 사회적 약속인 언어가 이 온전하고 반사회적인 사랑에 개입하게 되면 사랑은 그 본질을 잃게 된다. 그래서 연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언어를 몰아내고 침묵을 공유한다. 마치 언어를 습득하기 전 아기였을 때, 울음과 몸짓만으로 어머니와 나누었던 내밀한 소통을 떠올리는 것처럼. 침묵이야말로 언어로 이룩된 모든 사회적인 요소들이 가져오는 왜곡에서 벗어나, 온전히 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런데 작가는 침묵만이 완전한 사랑의 방식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가져온다. 사랑에 관련된 단어의 어원을 밝히기 위해 라틴어·헤브라이어·독일어 등의 외국어를 사용하는 데 거침이 없다. 이 다양한 언어들은 사랑의 침묵을 더욱 강조함과 동시에, 사랑을 말하는 아름다운 문장과 결합한다.

언제든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어도 되는 책. 뜻을 곱씹으며 끝까지 읽는 데에는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책.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하는 책. 그러나 확실한 하나의 주제를 위해 쓰여진 책. 이 모든 말이 ‘은밀한 생’이라는 책을 수식한다. 사람들은 대상을 규명하고 설명하기 위해 나 자신과 타인에게 끊임없이 말을 한다. 그러나 그 말들은 간혹 대상을 초과하기도, 대상에 미달되기도, 심지어는 대상과 무관하기조차 하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언어라는 무거운 이름에 짓눌려 질식해 버릴지도 모르는 사랑의 진실한 모습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황지선   이화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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