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 급한 사람을 등급으로 나눠 삼겹살을 먹을 때 모습을 살폈다. 3등급은 무난하게 고기가 다 익으면 먹는 사람. 2등급은 고기가 약 3도 화상을 입었을 때 젓가락을 드는 사람. 1등급은 김나자마자 삼겹살을 삼키는 사람이다.
정부도 성질 급한 데는 1등급인 모양이다. 교육인적자원부는 7일(목) 삼성그룹이 환원한 8천억 원 자금 관리 재단 출범을 위한 재단운영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이 8천억 원의 사회 환원을 발표한지 약 7개월만이다.
8월 초만 해도 교육부는 장학재단의 새 이사진을 구성할 이사진 추천단도, 추천단의 인원조차도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한 달 만에 재단운영준비위원회가 생겼다. 재단운영준비위는 10월까지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으로부터 환원된 기금 7천371억 원을 관리할 새로운 재단 명칭·목적·기본방향을 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재단운영준비위는 재단을 이끌어갈 이사와 임원진 9명도 선정해야 한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재단운영준비위가 재단을 이끌어갈 투명성과 청렴성이 보장된 재단 이사진들을 뽑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인지 의문이다. 재단 이사진을 선출하는 위해서는 후보들의 성향을 주도면밀하게 파헤쳐야 한다. 후보들의 정파적 이해관계 및 사회적 위치 등을 파악하는 물밑작업을 거쳐야한다. 그러나 9명이나 뽑아야 하는 이 때, 재단운영준비위에게 주어진 시간은 부족하고 할 일은 많아 보인다.
게다가 연말부터는 약 400억 원이 소외계층을 위한 장학 사업으로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10월 중 재단 이사와 임원은 결정된다고 해도 그들 또한 소외계층 학생이라는 다수를 대상으로 한 장학재단의 향후목적과 방향, 사용처까지 단기간에 결정해야한다.
교육부나 삼성 측에서는 이제 자신들의 일은 다 끝났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삼성은 8천억을 사회에 환수하기로 발표한 후, 실추된 이미지를 돈을 이용해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삼성은 사용처는 결정하지 않고 사회와 국가에게 그 책임을 넘긴 채로 물러났다. 삼성은 이사진 구성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삼성도 입을 꾹다물 필요는 없다. 8천억 원의 사용처를 고민하는데 있어 삼성이 생각하는 철학과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제시해줘야 한다.
현재 약 7천억 원의 사용처는 소외계층 학생을 위한 장학 사업으로 결정됐다. 교육의 양극화 해소를 주장하는 정부의 방침대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정권이 교체됨에 따라 그 사용처는 언제든지 바뀔 가능성이 있다. 사용처가 확실히 결정되지 않은 돈은 표류할 수 있다. 8천억 원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8천억을 손수 맡겠다고 자처한 정부조차 재단운영준비위만 서둘러 구성했을 뿐, 구체적인 목적과 쓰일 곳에 대한 아이디어를 고민하는데 있어 무책임하다. 아직 8천억 중 740억 원 상당의 주식은 추후 용처(用處)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한 교육부 관계자는 “재단 운영준비위가 활동에 들어가면 교육부는 삼성이 내놓은 8천억 원 기금 문제는 잊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단운영준비위는 교육부의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정부가 잊어서는 안된다.
이미 장학 재단을 위한 배는 떠났다. 하지만 재단운영준비위에게만 맡긴 채 정부도 삼성도 마냥 손놓아버렸다가는 난파당한 배 마냥 8천억 원은 떠돌아다닐 것이 분명하다.
전례 없는 8천억 원이 재단의 운영비와 인건비 등으로 엉뚱하게 쓰이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가 고민해야 한다. 재단운영준비위에게만 책임을 돌린 채, 8천억의 방향을 단숨에 요구해서도 결정해서도 안 된다.
재단의 운영과 자금의 구체적 용도에 대해 삼성과 시민·정부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심해야한다. 서로서로 재단의 투명성을 감시할 수 있는 눈이 돼야한다. 8천억 원 전부가 온전하게 국민 복지 등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 급할 필요는 없다. 헛되이 낭비되지 않을 최선의 방향을 모두가 차근차근 정해야 한다.
익지도 않은 삼겹살을 먹으면 배탈이 난다. 삼겹살도 제대로 익었을 때 먹어야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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