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부문 입상작]

등장인물
박하숙: 식당 여주인. 50대 초반
김철구: 하숙과 동갑내기 친구. 농부
강정대: 30대 후반. 농부
윤순호: 40대 후반. 농부
그 외 인물 (택만, 순경, 한태영)

무대
작은 식당 한 쪽에 카운터가 있고 그 안에서 여주인이 요리 겸 계산을 한다. 테이블이 두세 개 놓여있다. 정 중앙 쯤에 남자 둘이 앉아있다. 전체적으로 평범하고 약간 허름한 분위기이다. TV는 자주 쓰이므로 낡았어도 화면이 좀 큰 편이 좋다. TV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켜져 있다.

1장


철구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정대는 의자에 앉아서 TV를 보다가 건성으로 신문도 넘기고 한다.
무료해 보이는 두 사람.


철구: (기지개 피며) 아 요샌 뭐 일도 없고 맨날 여기 오는 게 일이야.
정대: 형수님이 뭐라고 안하세요? 우리 집 애는 잔소리가 정말 말도 못해요. 뭐 맨날 어딜 그렇게 돌아 댕기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아주 징해서 못살겠다니까요.
철구: 자식아 너랑 나랑 같냐? 지가 나한테 뭘 뭐라고 해. 너도 임마 한 20년 살아봐. 마누라 다루는 법쯤이야 그사이 자여언스럽게 알게 되니까.
정대: 그래요? 근데 그 슈퍼집 택만이 형님은 안 그렇잖아요. 아주 설설 기던데.
철구: 야 너는 어따가 또 나를 갖다대니? 내가 택만이 그 자식처럼 구린 인생이 아니야. 그 새끼가 그러고 사는 거는 다 젊은 시절에 집안 돈을 해먹어서 그런 거 아니냐. 촌놈이면 촌놈답게 땅 파먹고 살 생각을 해야지 뭔 부동산이다 사업이다 그 지랄을 하더만 지금 봐라 남은 거라곤 그 숨도 못 쉬게 좁아터진 슈퍼랑 마누라의 괄시뿐이잖아. 나는 자식아 그렇게 안 살았어. 영농후계자로서 내가 말이야…….
정대: (약간 귀찮다는 표정으로) 아, 예. 뭐 형님이야 대단하시죠.
철구: 아 이게 왜 말을 잘라?
하숙: (TV끄며) 보지도 않는 테레비는 왜 켜놓고 지랄이야. 전기세 니네가 내? 글고 아 염병 왔으면 뭘 시키고 이바구를 풀던가 하라고, 뭐야 지금?
철구: 아 염병은 뭐가 염병이야? 니 가게 지금 손님 있냐? 하여튼 요 년은 조 주둥이 땜에 여적 시집도 못갔을껴. 가시내가 어렸을 때부터 주둥이 쌍스러운 건 알아줬다니까.
하숙: 너 밖에 나가서 딴집 여자들한테 그렇게 년자 붙여가며 말하는 거 영미도 아니?
철구: 알면?
하숙: 너 같은 놈하고 20년이나 산걸 후회할 것이다.
철구: 민주 엄마가 너냐? 하여튼 조거 조거 하여튼……. 알았다 요년아. 소주 두병하고 김치찌개.
하숙: 안 팔아.
철구: 왜 그래 또오!
하숙: 영미가 접때 너 오면 술 팔지 말랬어. 특히 요즘 같은 농한기 때는.
정대: (슬쩍 웃음) 아니 뭡니까 형님. 다루는 법 다 아신다면서요? 형님이 아니라 형수님께서 다루는 법을 아시는 거 같은데요?
철구: (빨개진 얼굴) 시끄러워 이 자식아! 아니 영미 걔가 미쳤나…….아니야 뭐 내가 요즘 좀 여길 자주 오긴 했잖아. 그래서 그랬겠지 걔가 원랜 안 그래.(일어선다)
정대: 어디가세요?
철구: 음 물 빼러…….
하숙: 뭐 먹은 게 있다고 빼냐? 영미 들볶을 생각 하지도 마라. 너 같은 놈은 좀 잡혀 살아야 돼. 택만이도 택만이지만 너야말로 위험한 놈이니까. 영미나 되니까 같이 살지.
철구: (흘겨보며) 시끄러워! (철구 퇴장)
정대: (철구가 나간 쪽을 보면서) 하여튼 저 양반도 웃겨. 뭘 그렇게 힘을 주고 다니나 몰라요. 뻑하면 영농후계자가 어떻고 참 나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가끔 보면 택만이 형님보다 철구 형님이 더 안돼 보일 때도 있어요. 왠 ‘척’을 그렇게 하는지. 그냥 가만있으면 중이라도 가는데.
하숙: 넌 왜 뒷말을 하고 그러냐?
정대: 아 그렇잖아요. 이런 말 본인 앞에 대놓고 할 수도 있는데 저 형님이 이런 말 하면 들어먹기라도 할 인물입니까. 자기 잘난 맛에 50넘게 살아왔는데.
하숙: 하긴 저게 좀 웃긴 자식이긴 해. 내가 저 자식이랑 이 동네에서 평생을 같이 살아왔는데 쟨 입밖에 산 게 없거든……. 그래도 받아줘야지. 나쁜 놈은 아니니까. 쟤가 그런 맛없으면 뭔 재미로 살겠니. 쨋든 뒷말은 하지마라. 그러고 다님 너만 나쁜 놈 돼.
정대: 누님도 참 제가 다 애정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죠. 말 나온 김에 하는 소리지만 형님은 너무 꽉 막혔어요. 저번에 새 농기계 구입이랑 농법 도입 땜에 청년회에서 회의 있었는데 그때 또 한바탕 난리 났었거든요.
하숙: 왜?
정대: 아 형님이 그 한태영씨 멱살 잡고 아주 서울서 온 놈이 뭘 아냐는둥, 니가 우리 동네 다 잡아먹을려고 하는 거 모를지 아냐는둥, 쌍욕까지 나오고. 그나마 한태영씨가 점잖은 사람이라 그만했지, 아주 주먹다짐까지 할 뻔했어요.
하숙: 한씨 멱살은 왜 잡았대?
정대: 아 원래 형님이 한씨 별로 안 좋아 하잖아요. 근본도 없는 놈이라고. 제가 서울 살다가 여기로 돌아 온지 한 10년 됐잖아요. 28살 때니까 아 이제 11년째네. 하여튼 근데 한태영씨도 마침 저랑 비슷한 때에 여기로 들어오셨거든요. 그니까 철구 형님이 제가 여기 출신인거 뻔히 알면서고 어찌나 트집을 잡든지 한씨 따까리 할려고 돌아온 거 아니냐구요 한 3년은 괴롭혔어요. 볼 때마다 물어보는데 증말…….
하숙: 근데 철구는 한씨가 왜 그렇게 싫다니?
정대: 뭐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데다갉…. 그래봤자 2,3살인가 밖에 차이 안 나긴 하지만. 또 한태영씨는 여기 출신 아니잖아요. 서울 토박이. 그런 사람이 자기 고향에 들어와서 설친다고 싫은 거겠죠. 글구 한태영씨가 가방 끈이 길잖아요. 그것도 꼴불견이래요. 괜히 무시당하는 기분 드는 거 아니겠어요? 형님은 중졸이니까.
하숙: 허이구 내 참 별것 가지고 그런다 증말 유치하게. 근데 한씨가 서울대 나왔댔나?
정대: 네, 서울대 농대 출신이요. 졸업하고나선 몇 년인가 대기업 다녔대요. 월급도 무진장 받았다던데. 그러다가 회사 그만두고 가족들 데리고 온 거죠 여기로. 농촌경제 부흥을 위하여!
하숙: 회사서 짤린 게 아니라? 하긴 뭐, 그땐 IMF도 아니었으니까. (약간 아니꼬운 듯이) 근데 왠 오지랖인지 몰라. 고향도 아닌데 와가지고 농촌 경제를 살립네 어쩌네 설레발치니까 철구 쟤가 더 그러는 거 아니겠어. 나도 첨엔 좀 그렇더라.
정대: 지금도 그러세요?
하숙: 아니 뭐 지금은……. 어쨌든 한씨 오고 나서 좋아진 것도 있고 ,덕본일이 없지는 않으니까.
정대: 그렇잖아요, 대부분은. 저라고 뭐 첨부터 두 팔 벌려 환영했겠어요? 근데 형님은 여적 저러시니까. 아니 접때 한태영씨가 마을 대표된 이후에는 더 그러시는 거 같애. 그것도 감투라고 넘이 쓰니까 배가 아픈지 어찌나 욕을 하던지.
하숙: 자네는 좋은가봐 한씨가?
정대: 뭐 첨엔 그저 그랬는데, 철구 형님이 하도 볼 때마다 한태영씨 욕을 해대니까 오히려 더 맘이 가더라구요. 또 뭔가 그분이랑은 맞는 게 있어요. 저도 이류긴 하지만 서울서 대학 나왔잖아요. 왠지 연대의식 같은, 거 뭐랄까 사명감이랄까 그런 것도 느껴지고.
하숙: 얼씨구...
정대: 솔직히 그렇잖습니까. 농가도 개혁이 필요해요. 언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옛날에 하던 식으로 할 순 없잖습니까. 한태영씨 아니었으면 여기도 아주 폐촌 됐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하숙: 하긴 그나마 여긴 났지. 강원도 깡촌 같은 덴 어쩌나 싶어. 아니 농사를 안 지으면 밥은 어찌 먹고 살라고들 그러는지.
정대: 그러니까요. 젊은 애들이 농사는 3D라고 싫어하니까. 참, 3D 아세요 뭔지?
하숙: 이놈이 누굴 무시하나. 이 자식아 나는 철구랑 달라. 그래도 난 전문대는 나왔다고.
정대: 어? 누님 대학 나오셨구나? 새로운 사실이네. 아 글고 보니까 서울서 꽤 오래 사셨다드만 그건가 보구만. 서울서 뭐하셨는데요?
하숙: 시끄럽다. 근데 얘는 오줌을 만들어서 누나, 왜 이리 안와. 혹시 진짜 영미 볶으러 간거 아냐? (순호 등장)
순호: 여기 있었구만. 내 그럴 줄 알았어.
정대: 오, 형님!
순호: 근데, 철구 형님은 어디 가셨나?
정대: 몰라요. 오줌 눈다고 해놓고는 감감무소식이네. (킥킥거리다가) 좀 꼬리를 잡혔거든요. 쪽팔려서 도망갔어요.
순호: 응? 건 또 뭔 소린고?
정대: 아 거 왜 철구 형님 허풍이 심하시잖아요. 뭐 마누라를 꽉 잡고 있다느니 그러더만 아닌 거 다 뽀록났다구요. 누님 덕에.
순호: 하여튼 그 양반도 참. 근데 동네에 뭔 일 있나?
정대: 네? 왜요?
순호: 아니 오다보니까 구급차랑 막 급하게 어디 가든데. 어째 파출소도 다들 급히 어디 가더라고.
정대: 글쎄요. 뭐 저는 계속 여기 있었으니까. 누가 좀 다쳤나보죠. 이 조용한 동네에 뭐 별일이야 있겠어요?
순호: 하긴 뭐. 누님! 여기 뭐 좀 줘요. 아침을 안 먹었더니 배고프네.
하숙: 집에서 밥도 안 먹고 뭐하고 다니냐?
순호: 아니, 그게 뭐 좀..
정대: 혹시 형수님이랑 싸웠어요?
순호: 뭐, 그렇지 뭐.
정대: 왜요? 뭣 땜에요?
순호: 아니, 있잖냐, 니네 집사람은 안 그러냐?
정대: 뭘요?
순호: 막 있냐, 아무리 일이 없어도 너무 한다고, 맨날 여기만 온다고 으찌나 바가지를 긁던지. 글다 보니까 좀 토닥 거려서잉…….
정대: 그렇다고 밥도 안줘요? 형수님도 참.
순호: 느그 유미 엄마는 안 그러냐고.
정대: 뭐라고 싫은 소리야 좀 해도 그렇진 않아요. (전화벨 울린다 하숙 전화 받음) 아무리 그래도 가장 밥을 굶기겠어요? 걔가 글구 좀 저한테 순종적인데가 있어서 (목소리 낮추며) 제가 밤에 서비스가 확실하거든요 흐흐.
순호: 좋것다 너는…….
하숙: (전화 끊으며) 강정대!
정대: 예?
하숙: 유미 엄마다.
정대: 왜요?
하숙: 너땜에 못 살것단다. 아니 왜 우리 가게가 동네 유부녀들한테 타도 대상이 돼야 하냐고! 마누라가 말하면 말들 좀 들어 진짜. 내가 이런 것들하고 살까봐 시집을 안간 거야, 알아?
정대: (머쓱해서) 아 가시나 고거, 그샐 못 참고 말이야…….
순호: 니도 뭐 철구 형님이랑 별 다르지도 안구만 뭐.
정대: 아이 아녜요. 그 정도는 아녜요. (철구 등장)
철구: 야 박하숙이! 너 왜 거짓말 하냐?
하숙: 얼씨구 하는 꼴 보아하니 또 그샐 못 참고 집까지 쪼르르 달려갔다 왔구만.
철구: 그래 갔다 왔다! 넌 왜 있지도 않은 말을 하고 그래?
정대: 왜 그러세요?
순호: 성 나 왔네.
철구: 응, 응, 그래. 아, 야! 내가 집에 가서 물어보니까 민주 엄마가 그런 말 한적 없대잖아.
정대: 그래요?
철구: 그렇다니까. 참나 그럼 그렇지 미영이가 너냐 요년아?
정대: (못마땅) 형님도 참. 그렇다고 그걸 물어보러 집까지 갔다 옵니까? 전화 있잖아요. 그보다 물어보는 거 자체가 좀 그러네요. 아님 아닌 거지 뭐. 우리는 형님 똥간에 빠져서 못나오는 줄 알았수.
하숙: 누가 아니래냐, 진짜 유치하게 놀아요.
철구: 이 자식아. 그게 아니지 자식아. 부부사이 이간질 시키는 거잖아. 이건.
순호: 그럼 정대만 그런 거네. (일동 순호를 돌아본다.)
철구: 건 또 뭔 소리야?
정대: (아차 한다) 아뇨, 별거 아녜요.
순호: (아랑곳 않고) 있잖아 성, 정대네 애가 전화해가지고……. (그때 택만이 가게로 요란스럽게 뛰어 들어온다.)
택만: (큰소리로) 큰일!
철구: 아 깜짝이야. 뭐야 자식아. 아 깜짝이야 진짜.
택만: (숨을 몰아쉬며) 큰일이야 큰일! 야 이거 진짜 별스런 일이 났다. 이거 뭐 진짜…….
정대: 무슨 일인데요?
택만: 살인사건이랴!
하숙: 뭐, 어디 신문에 연쇄살인 기사라도 대문짝만하게 났냐?
순호: 요샌 뭐 그런 일이 뭐 좀 많아야 말이지…….
정대: 그러게요. 세상이 왜 이러나 몰라.
철구: 에이 자식아, 그런 거 가지고 뭔 지랄이야.
택만: (바들바들떨며) 아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고오! 한태영씨 가족이 싸그리 죽었대! 누가 밤새 다 죽여부렸대! 아주 징하대! 애까지 다!

일동 굳어지며 아무 말도 못한다.
암전이 되며 TV가 혼자 틀어진다. 뉴스 멘트가 흐름.

- 오늘 오전 11시쯤 경기도 모모시 모모마을에서 일가족 3명이 자택에서 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시신이 모두 칼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찰은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찰은 주변 인물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에 나서고 있습니다. -


2장

하숙이 테이블을 닦고 있다.
가운데 테이블엔 순호가 담배를 피며 신문을 보고 있다.
조명은 1장보다 조금 어두운 분위기.
TV는 꺼져있다.
정대 등장.

정대: 누님, 오랜만입니다. 형님도 여기 계셨네.
순호: 응, 뭐.
하숙: 오랜만은……. 일주일 좀 넘었구만. 글구 그저껜가 길가다 만났잖아.
정대: 아이 왜 말꼬투리를 잡고 그러세요. 안 그래도 요새 여기도 못 오고 마누라란 것은 들들 볶아대지 짜증나 죽는 줄 알았구만.
하숙: 여기도 안 오는데 마누라가 왜 볶아.
정대: (눈치 보며) 아, 그, 그 사건 땜에요…….
순호: 한태영이?
정대: 네에.
하숙: 그게 왜?
정대: 아이 뭐, 이사 가자구요.
하숙: 아니 뭐 땅값 떨어질 걱정도 없는 촌구석인데 왜?
정대: 무섭다고 난리예요. 께름칙하대요. 애들 있기에도 좀 그렇고……. 누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순호: 나도 좀 거시기 하드만. 우리 집사람도 통 남 말 하는 인물이 아닌데 한마디 하더라고. 무서워 살겠냐고.
하숙: (몸서리치며) 으휴! 징한 것들, 참.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순호: 그러니까 말이요.
정대: 사실 저도 처음 며칠은 진짜 쫌 그렇대요. 영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진정도 안 되고. 딴 사람도 아니고 한태영씨가 말이죠…….
순호: 글고 보니까 너는 좀 따랐잖아. 한태영이.
정대: 뭐 그랬죠. 그분이랑은 진짜 맘이 잘 맞는 것 같았는데. 사실 이런저런 계획 같은 것들도 같이 세우고 그랬었는데……. 아, 진짜 이상해요.
하숙: 근데 그 사람 집에 그 개놈의 자식들이 들어간 이유가 정확히 뭐래?
정대: 뉴스를 봐도 뭐 그런 것 같다는 둥 넘겨짚기만 하고 정확한 이유는 안나오데요. 조사 중이라고만 하지.
순호: 파출소 애들도 뭐 깜깜하더만.
하숙: 갸들이 뭘 알겄냐. 완전 밑바닥에 시다들이잖어. 경기도 경찰청서 막 오더만 사람들. 여기서 처음 며칠 밥도 사먹고 그랬어.
정대: 장사 좀 됐겠네요.
하숙: 장사는 무신. 오던 놈들은 안 오고 안 오던 놈들이 왔으니까 그게 그거지 뭐.
순호: 근데 발견한 사람이 또 애라며?
정대: 그렇대요 그게. 한태영씨 딸 도경이 친구래요.
순호: 어이구야, 인제 겨우 중3아녀 글믄? 큰일이구만.
정대: 듣기로는 정신병원에 입원 했대요. 충격이 너무 커서 애가 헛소리하고 잠도 못자고, 말이 아니래요.
하숙: 쯧쯧. 그냥 죽어 자빠져 있는 것만 봐도 애가 그냥 거품 물 지경일 텐데, 칼로 그 난리를 쳐놨으니……. 왝, 난 생각만 해도 막 눈앞이 어지럽다.
정대: 파출소에 이순경도 신고 받고 가서 봤는데 진짜 보통 정신으로는 안되겄더래요. 구역질 몇 번 했다 그러더만요.
순호: 그래, 갸도 언제 그럴 꼴을 봐 봤어야지. 우리 동네야 기껏 해봐야 영감들 술 마시고 주정 부리다 이마 깨지는 거 말고는 피 볼일이 뭐있나. (철구 등장)
정대: 아, 형님 오셨어요?
순호: 왔는가, 성?
철구: 어, 그래.
하숙: 허이구 동네 놈팽이들 인제사 좀 정신이 든갑네. 며칠은 코빼기도 안 뵈더니 오늘에사 꾸역꾸역 모여드는 것이.
철구: 술이나 좀 줘봐. 또 뻥칠 생각은 하지도 말고. (TV킨다) 야 지금 몇시냐? 곧 정오뉴스 하겄지? 좀 봐봐. 나 나온다.
정대: 왜요?
철구: 방송국서 나 찍어갔어. (과장되게 혀를 굴리며) 인터뷰우.
순호: 그거 혹시 MBS 아닌가?
철구: 맞아
순호: 거 뭐 다 하드만 뭐. 나도 했어.
철구: 그래?
정대: 그건 저도 했어요.
철구: (인상쓰며) 에이씨 뭐야, 다 한거야?
하숙: 야 이 속없는 종자야. 넌 그게 뭐 좋은 일로 인터뷰 한거라고 자랑이 하고 싶냐? 어째 인간이 저래 속이 없는가 몰라. 나이만 쳐먹고.
철구: 야, 니미 죽은 건 죽은 거지, 우리가 뭐 향 피워 놓고 쳐 운다고 그 사람들이 다시 사냐? 부모 형제도 아니고 한 며칠 안됐네 그러고 생각했음 됐지 내가 왜 그 식구들땜에 일주일 넘게 넋이 빠져 있어야 하냐고.
하숙: 저놈에 꼬라지하고는.
정대: 형님, 그래도 그런 게 아니죠.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안 좋게 남의 손에 죽었는데……. 것도 아무 이유도 없이.
철구: 그래, 넌 원래 하태영이 그 놈 따까리였지?
정대: 형님, 그게 왜 또 그 소리가 지금 나옵니까?
철구: 됐어 새끼야. 입 닥쳐. 넌 그래 뭐라 안 할 테니까 혼자 계속 슬퍼해라. 뭐 니가 삼년상까지 다 해. 글구 이유가 왜 없냐? 어디서 원한 살 짓을 했거나 아님 부자니까 돈 땜에 그런 거겠지. 살인나면 이유는 둘 중 하나 아녀?
순호: 요즘은 치정 땜에 칼부림도 많이 나드만…….
철구: 듣자니까 범인이 둘 인거 같다네. 그럼 그건 아니지.
순호: (볼을 긁적이며) 그런가?
정대: (어이없어) 아니, 그게 지금 그렇게 재미있게 얘기할 내용입니까? 너무들 하시네.
철구: 얼씨구. 야 혼자 바른 척 하지마라. 남은 남이지.
정대: 그래도,
철구: (말 끊으며) 한다!
일동 TV에 시선이 간다.
순호: 언제쯤 나온데요?
철구: 글쎄. 뭐 일주일도 더 지난일이니까 맨 첨은 아니겄지? 근데 화면이 왜 저러냐. 얼굴이 다 뭉개졌고만.
하숙: 그러게. 요즘 테레비 수신이 별론가. 화면이 영 거지같네. 안방 것도 그러더만.
순호: 이따가 안테나 봐 드리까?
하숙: 응, 좀 그래봐봐.

TV멘트
다음 뉴스입니다. 얼마 전 경기도 모모시 모모마을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인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는 듯 합니다. 범인의 범행 동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기자입니다.

순호: 근디 진짜 나오긴 나온가?
철구: 잠자코 봐봐 자식아.

기자 멘트
그럼 마을 주민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화면에 모자이크 된 얼굴이 나온다. 철구다. 자막으로 주민 K씨라고 나온다.
TV속 철구는 음성까지 변조되어 있다.
에, 뭐 그 사람이 말이죠,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배운 것도 많고, 무엇보다도 우리 마을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다들 뭐 좋아라 했었는데,
거기까지만 나오고 다시 기자의 멘트로 넘어간다.
결국, 한모씨 일가족의 살인사건의 원인을 밝혀 내는데는…….

철구: 아 왜 짜르고 지랄이야! 또 왜 넘의 얼굴에다 뭘 칠하고 그래. 목소리는 또 왜 저러고.
하숙: 염병합니다. 너는 그러면 살인 사건 땜에 인터뷰함서 전국에 니 얼굴이 다 나가길 바랬냐. 애기들도 너보담 낫것다.
순호: (철구를 슬쩍 보면서) 흐음, 뭣이 좀 이상허네.
정대: (비꼬는 말투) 뭐요? 다들 좋아라 해요? 참 나. 그럼 철구 형님은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닌갑네요.
철구: 아니 근데 이 새끼는 아까부터 진짜 왜이래? 한태영이가 니기 애비냐, 에미냐? 새끼야 그럼 카메라에 대놓고 그새끼 잡새끼다 그러냐? 엉?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좀만한 것이 귀엽게 봐준 줄을 모르고 기어올라 아주. 내 목 타고 넘겄다 아주.
정대: 형님, 사람이 그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르고 그러는 거 아니죠. 뭐 형님이야 그럴 사람이란 거 알고는 있었습니다마는. 아주 기가 차네. 우리끼리 있을 때는 한씨 죽은 거 아주 잘됐다는 듯이 떠들어 놓고는 그래도 방송이니까 무섭긴 한가 봐요? 거짓말도 찍찍 잘하고? 무서운 양반이네 이거. 자기 좋을 짓이라면 뭐든 하겠어.
철구: 이 씨발놈이. (벌떡 일어서며) 야 이개 씨발놈아, 너 지금 말하는 그 꼬라지가 뭐냐? 내가 언제 한태영이 죽은 게 좋다 그랬어? 니놈이 오바하는거야! 니놈이야말로 뭐 뒤가 구려서 그렇게 걱정하는 척 하는 거 아니냐?
정대: 뭐요? 참 나 별 개같은 소릴 다 듣겠네. 길가는 사람 잡고 물어보슈. 나하고 당신 둘 중에 누가 더 한씨 죽인 놈 같은가! 동네 사람 다 아는 사실을 저만 몰르고 있어. 하긴 모르는 게 좀 많아야지. 에이, 니미 진짜! (정대 퇴장)
철구: 야! 이 개새끼야! 어디 가냐! 씨발놈 내가 즈이 아버지 봐서 좋게 봐 줄라고 했드만 이새끼 너 진짜 한태영이 그놈 따까리 맞지?
하숙: 아이구 고만해! 어디서 쌈질이냐. 둘이 똑같구만.
철구: 시끄러 이년아!
순호: (철구 앉히며) 자, 자, 성, 술이나 해요 술이나.
하숙: (혼잣말) 그 개놈이 얼른 잡혀야지 이러다가 동네가 두쪽 나겄네.
하숙 카운터 쪽으로 가며 TV를 끈다. TV가 꺼짐과 동시에 암전.

3장.

계절이 조금 변한 듯한 옷차림. 철구가 앉아서 밥을 먹고 있다.
하숙은 카운터에서 TV보는 중.
순경1 등장.

순경: 아주머니, 밥 좀 배달되죠?
하숙: 응, 몇 개?
순경: 두개요.
하숙: 근데 왜 전활 안하고 왔어?
순경: 아 어디 좀 갔다 오는 김엡….
철구: 어디 갔다오냐?
순경: 아, 저기 한태영씨 댁엡….
철구: (갑자기 숟가락을 탁 놓는다) 야, 니미 근데 니기들은 뭐하는 거야?
순경: 네?
철구: 지금 사건 난지 2달이 넘었다고. 곧 있으면 세달 짼데 뭐시 되가고 있기는 하냐?
순경: (당황한 얼굴로) 저는 글쎄 잘…….
철구: 얼씨구, 우리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아 처먹는 것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하숙: (인상 쓰며) 작작 좀 해라. 쟤가 뭘 알겠어? 아주 요즘은 보는 사람마다 물어뜯을라고 안달이야 저것이.
철구: (아랑곳 않고) 느그들이 그렇게 대충대충 사니까 동네 사람들이 못 살것다고 난리잖아! 요새 인심이 얼마나 흉흉한지 알아? 여기가 그런 데가 아니었다고!
하숙: 이따가 내가 배달 해다 주께. 한 20분 후에. 가 봐.
순경: 아, 예.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얼른 나간다)
철구: 야! 가긴 어딜 가! 이리 와봐!
하숙: 그만하라고 좀. 니가 동네 분위기 제일 흐려. 알아? 영미가 너 요새 만날 술 처먹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거 아주 짜증나 못살것다고 그런다.
철구: 이년 또 뻥까네.
하숙: (한숨) 맘대로 생각하시오, 맘대로.

정대와 순호 등장.
정대는 다른 테이블에 가 앉는다.
조금 눈치를 보던 순호도 정대와 같은 테이블에 앉는다.
철구 암말 않고 순호를 노려본다.

순호: (멋쩍게) 오늘은, 저기, 정대랑 같이 왔으니까…….
철구: 체!
정대: (무시) 누님, 제육볶음에 소주 좀 주세요. (철구를 한번 힐끔 보고는 짐짓 큰 목소리로) 근데 말이죠, 경찰이 수사 방향을 틀었다고 하데요.
순호: 뭔 소리여 그것은 또?
정대: 면식범의 소행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순호: 면식범?
정대: 네에, 면식범. 얼굴을 잘 아는 사람의 소행이 아닌가 하고 그쪽을 다시 집중 조사 한다네요. 그래서 평소에 한태영씨 욕하고 다니던 마을 주민 대상으로 심문을 한다고 하더라구요.

순호와 하숙, 철구 눈치를 살짝 본다.
철구, 아주 짜증난다는 표정.

철구: (혼잣말처럼) 경찰 났네. 아주 지가 경찰인가벼. 하긴 부모 같은 분이 돌아가셨으니 따까리로서 할 일은 다 해야지. 암. 그럼.
정대: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예요?
철구: 아, 너 왔었냐? 근데 너 누구드라?
하숙: 또 시작했구먼. 요 며칠 조용하다 했어. 싸울라면 나가!

하숙의 호통에 세 사람 잠시 조용해진다.
그러다가 철구가 또 뭔 생각이 난 듯이 손뼉을 짝 친다.
일동 철구를 바라본다.

철구: 아아! 그러고 보니 하숙아, 내가 또 뭔 소리를 들었는지 아냐?
하숙: (불안한 얼굴로) 얘 또 뭔 소릴 할라고 이래?
철구: 진짜 재밌는 얘기다. 진짜.
순호: 뭔데요?

철구와 정대 순호를 한번 쳐다봄.
순호 머쓱해서 고개를 돌림.

철구: 글쎄, 한태영이 그 사람이,
하숙: 에구, 됐다 됐어. 또 뭔 쓰잘데기 없는 소릴 할라고 그러냐.
철구: 아니라니까. 진짜 이건 빅뉴스여 빅뉴스. 한가 그 놈이 글쎄 종내는 우리 동네 임야를 다 사 들여 가지고 여기를 비싸게 팔아먹을라고 했었다지 뭐냐.
순호: 진짜요?
하숙: 진짜야? 완전 개뻥 같은데.
철구: 이게 끝이 아니지. (정대를 한번 바라보고) 그 도둑놈 같은 계획에 우리 동네의 자랑스러운 청년 강정대씨가 참여 했다는 거 아니냐. 나 이거 참, 놀랍지 않냐?

순호와 하숙 정대를 쳐다본다.

정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어디서 그딴 소리를 듣고 그러세요!
철구: 경찰.
순호: 뭔 소리요 그건 또.
철구: 우리 아들 친구가 경기도 경찰청에 있잖아. 갸가 쪼오끔 알려준 바에 의하면 한태영이 그 놈이 보통 놈이 아니드라고. 우리가 순진해 빠져가지고는 홀랑 속았다 이거여. 내 그놈이 그런 놈일 줄 알고 있었다니까.
순호: 근데 경찰은 그걸 어떻게 안데요?
철구: 야, 경찰이 괜히 경찰이냐. 조사하면 다 나와. 우리같이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니까.
하숙: 진짜야? 진짜면 조끔 그렇다…….
철구: 강정대가 어느 인산지는 몰라도 무서운 놈 아니냐. 동네를 팔아먹을라고 하다니. (과장되게) 아이구 무서워. 그런 놈이랑 같이 한 동네에 살았다는 것이 난 참말로 무섭다.
정대: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너무하시네. 저하고 한씨하고 둘이서 사업 계획 짠 건 맞는데요, 잘 알지도 못하시면 나서지 말아주세요!
철구: 오, 자네가 강정대씨?
정대: 한태영씨랑 저랑 마을 부지 구입할려고 했던 건 그런 더러운 이유가 아녜요. 어디서 듣고 와도 꼭 자기같이 더러운 소리만 듣고 와서는……. 사람 우습게보지 마세요!
철구: 근데 이 새끼는 입도 사납네.
정대: 그러는 김철구씨야 말로 자기가 의심받으니까 무서워서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하는 거 아녜요?
철구: 뭐?
정대: 한태영씨 죽은 날 밤에 혼자 술 쳐 마시고 좋아서 동네 다님서 좋다고 노래 불렀다면서요? 그냥 좋은 게 아니라 혹시 당신이 죽인 거 아니냐고! 애까지 다!
철구 : 이런 씨발 놈이…….

철구 벌떡 일어나서 정대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정대 지지 않고 철구에게 맞받아친다.
체격도 더 좋고 더 젊은 정대가 금세 철구위로 올라탄다.

정대: 왜? 할말이 없으니까 인제 주먹이 나오시나 봐? 이게 본색이지?
하숙: 이런 개 잡놈들아! 싸울라면 나가라고 했지 내가!

아랑곳 않고 치고 박는 두 사람.
순호는 슬그머니 어디론가 나간다.
씩씩거리는 철구.

철구: 이 새끼 이 개 새끼 내가 첨부터 너 맘에 안 들었어 이 새끼야. 어디서 대학도 거지같은데 다니다 와가지고는 꼴에 서울물 먹었다고 깝치고 지랄 설치고 지랄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어 아주!
정대: 당신은 뭐 내가 형님 형님 해주니까 진짜 형님 될만해서 형님인줄 알았어? 나잇값도 못하고 아주 온 동네에 설레발치고 다니고 남들은 좋아라 하지도 않는데 괜히 참견이나 하고. 7,80 먹은 노친네들도 당신처럼 주책은 안떨어, 알아?
하숙: 그만 하라고!

무대를 뒤엉켜 굴러다니는 두 사람. 적당한 음향효과도 좋다.
무대로 들어오는 순호와 순경.

순호: (두 사람을 손가락질 하며) 좀 어떻게 해봐 좀.
순경: (선뜻 나서지 못하고) 왜, 왜 그런데요오…….
순호: 아 좀 말려보라니까.
순경: (주춤주춤 다가가서 두 사람 곁에 선다. 몸싸움하는 철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저, 저기요…….
철구: 넌 또 뭐야 자식아!
정대: 이 새끼 빠져 넌! (갑자기 순경에게도 달려든다. 순식간에 세 사람이 뭉쳐서 뒹군다.)
하숙: (보다 못해) 이 니미럴놈들이…….

하숙이 빗자루를 들고 세 사람을 때린다.
이제는 네 사람이 뭉쳐서 난리다.
순호는 되도록 피하려고 몸을 사리는데
네 사람이 정신없이 다투는 사이 점점 순호에게 다가온다.

순호: (피하며) 어어, 저리가, 저리 가서 싸워. 어어, 오메 오메!

결국은 순호도 말려들어 다섯이서 난장판이다.
테이블은 다 넘어지고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정대와 철구. 빗자루를 들고 쫓아다니는 하숙.
영문도 모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순경과 사이에 끼어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순호. 한두 명씩 무대 밖으로 나갔다고 다시 들어오고 하는 소동이 몇 분 동안 계속된다. 욕지기는 기본.
갑자기 TV소리가 커진다. 뭐라고 하는 TV소리가 들림.
하숙만 동작을 멈추고 TV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머지 사람은 그대로 난리통속이다.

하숙: 잠깐! (여전히 떠들썩함)
하숙: (더 크게) 조용히 해! 잠깐 멈춰어!

그제야 조금씩 잦아드는 난장판.
TV멘트.
속보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모모시 일가족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되었습니다.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 시키고 있던 수사본부는 서울시 영등포구의 한 술집에서 용의자 최 모 씨를 검거했습니다. 정확한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조사 중이며 한 관계자는 최 모 씨가 범인임이 틀림없는 정황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최씨는 현재 가석방상태로……. (소리가 조금씩 줄어듦)

잠시 멍하니 멈춰있던 일동. 순경이 제일 먼저 움직인다.

순경: (눈치를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저, 저는 가봐얄 것 같네요. 일이 내려올 것 같네요……. 저기, 싸우지들 마시고……. 그럼 저는 이만. (순경 퇴장)
하숙: (주위를 둘러보며) 니미 진짜 이게 뭐냐. 아 썅. 다 치워 이 씨발 것들아.

철구, 순호, 정대 아무 말 없이 테이블을 세우고 무대를 정리.

하숙: 다들 헛살았어, 헛살아. 진짜 나잇값이 뭔지나 알고들 사냐? 자기 못난 거 알고 사는 거야 병신들아. 어디 할일이 없어서 동네 사람들끼리 이 지랄이야. 할 말이 있으면 말로다가 하지. 유치원 다니는 애기도 아니고 그렇게 유치한 짓거리들이나 하고. 니기 마누라들이 세상서 젤로 불쌍하다.
순호: (볼멘소리) 마른하늘 날벼락이라고, 이게 뭔 일인가 몰라.

정대와 철구, 서로를 흘끔 바라본다.

하숙: 언제까지 서로 그렇게 곁눈질만 해댈꺼야? 하느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 고 하셨어 이 화상들아.
정대: (조심스럽게) 원수를 사랑하라 아닌가요?
하숙: (눈을 부라리며) 야! 둘 다 했어! 글고 이웃이나 원수나 그게 그거지. 딱 지금 니네들 꼴이 그렇구만.
철구: (멋쩍게) 아는 척은 하고 지랄들이야. (딴 곳을 쳐다보며) 강정대, 뭐, 그것이 아니라면 됐다. 내가 윗사람이니까, 내가 먼저, 뭐냐, 그, 화해한다.
정대: 그것이 아니라면, 이라뇨?
철구: 한가 놈이랑 우리 동네 팔아먹을라고 한거. 아니믄 됐다고.
하숙: 어째 그리 갑자기 꼬리를 내리시나. 아주 정확한 뉴스라고 난리드만.
철구: 에이씨 니미 그것이 진짜 참말이라고 해도 인자 돈 대줄 사람 없어졌으니까, 별 소용없는 거 아니냐고! (철구 퇴장)
순호: 뭐 아까는 한가가 살아있었나.
하숙: 괜히 꼬투리 잡아보고 싶었던 거지. (정대 보며) 야 너도 잘한 거 하나 없다. 어린놈이 그래도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면 안 돼지.
정대: (불퉁한 표정) 알아요. 뭐 좀 열이 확 올라서 그런 거예요. 나보고 나쁜 놈이라고 하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순호: 근데 진짜로는 어찌 된거여?
정대: 뭐가요.
순호: 아 한가랑 손잡고 어쩌구 했단 거.
정대: 에이, 몰라요. 아무튼 진짜 그런 건 아니었어요……. 뭐 잘하면 나한테 돈이 좀 들어올 수도 있기는 했지만 철구 형님 말처럼 동네 홀랑 팔아먹는 그런 짓은 아니었다구요. 에이 진짜, 그 개 호로섀끼 땜에 일 다 틀어지고, 콱 사형 받고 뒈져버려라! (정대 퇴장)
하숙: 으이그, 못난 것들. 진짜로 무지하게 쪽 팔리것다. (순호 돌아보며) 넌 안가?
순호: 한바탕 뛰었더니 배가 고프네. 아까부터 고팠는디. 밥 좀 먹고 갈라구.
하숙: 요즘도 밥 못 얻어 먹냐?
순호: 자꾸 보채서 또 싸웠지 뭐.
하숙: 이번엔 왜 또.
순호: 아 글쎄 자꾸 주변 사람들이 무섭다고 세콤인가 뭐신가 그런 것을 달자고 그러네. 아니 말이 되냐고. 이런 촌구석에 그것도 양옥도 아닌 우리 집에 말이야.
하숙: (한숨쉬며) 그 놈이 진짜 호로새끼네. 하느님 말씀 따르기가 힘들어 그 호로새끼땜에.
순호: 하느님?
하숙: 아 이웃을 사랑하라!!
순호: 아……. 근데 언제부터 교회 다녔는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묻는 순호를 보며
하숙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카운터 쪽으로 간다.
순호 영문 모를 얼굴로 TV를 보다가 갑자기 혼자 자지러지게 웃는다.
TV에는 어느 샌가 코미디 프로가 한창이다.
하숙의 한심하다는 표정과 순호의 발작적인 웃음소리와 함께 조명이 점점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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