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화글빛문학상 당선작-서수진(국문.06년졸)

7.
오프닝을 마치고 빠져나오듯 아진은 혼자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서자 여전히 피아졸라의 탱고선율이 집에 가득했다. 아진은 벌써 일주일간 내내 들은 피아졸라의 음반을 꺼냈다. 음반을 바꿔 틀면서 아진은 지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성공한 사람의 여유와 빛깔이 그가 지니던 특유의 자신감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분명한 말투와 눈빛 속에 아주 미묘하게 흔들리는 그것을 발견한 순간 아진의 마음 역시 흔들렸었다. 그래서 그를 따라갔던가. 아진은 고개를 저으며 불손하게 성큼 들어선 그를 떨쳐내려 노력했다.

작업실로 들어간 아진은 텅 빈 작업실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아진은 어젯밤에 미처 빨지 못한 붓을 들었다. 오늘 새벽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던 보라색 꽃을 다듬느라 보라색 물감이 잔뜩 묻어있었다. 물감이 엉긴 붓을 세척제에 담가 천천히 흔들며 풀었다. 어느 정도 풀어진 붓을 들어 작업실 안 개수대에서 붓을 빨았다. 비누를 묻혀 깊은 곳까지 색을 제거했다. 마무리작업에 쓰였던 세필붓이라 이내 털에 붙어있던 물감이 모두 씻겨갔다. 수건으로 깨끗하게 물기를 제거하고 붓통에 담아 넣은 아진은 손을 바라보았다. 물감이 묻어 보라색으로 물든 손. 비누를 묻혀 씻고 또 씻어도 손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아진은 당장 지워지지 않는 줄 알면서도 반복해서 손을 씻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자신도 모르게 섬뜩 놀란 아진은 가만히 거실 쪽을 바라보다 다시 손을 씻었다. 벨은 질기게 울렸다. 아진은 거실로 천천히 나와 핸드폰을 집었다.

“전화받을 수 있어? 바쁜 건 아니지?”
바로 어제까지 통화하던 사람처럼 태연한 목소리. 지석이었다.

“무슨 일이예요?”
아진의 건조한 목소리가 송화기를 건너 수화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울렸다. 말라붙어있던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너를 인터뷰할까 해. 편집장인 내가 직접 나섰으니까 고마워하라고.”
아진은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들었다. 핸드폰을 놓은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보라색으로 물든 손.

“전시회가 끝나는 게 다음 주 화요일이지? 수요일이나 목요일 중에 보지 뭐.”
인터뷰인데 만나지 못 할 것도 없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당연하고 또렷하지 않은가, 아진은 손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수요일 저녁에 보죠. 시간을 많이 낼 수는 없어요.”
“그러지, 내일 다시 연락할게.”
남자는 경쾌하게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핸드폰을 들고 있던 아진은 잠시 웅크리고 있다가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 오디오에 음반을 갈아 끼웠다. 피아졸라의 음반이었다. 탱고의 애절한 음색을 들으며 지석이 말했었다. 탱고 있잖아, 그 격렬한 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서로 바라보는 눈길이야, 그 눈길에 가질 수 없는 애틋함이 깃들여 있어야 해. 곧 끊어질 듯이 애상적이다가도 다시 격렬하게 몰아쳐대는 리듬은 사랑이 아니라 슬픔에서 나오지. 아무리 몸부림쳐도 해결될 수 없는 슬픔에서 말이야. 당신과 나는, 증오에 가까워지도록 소유할 수 없었던 당신과 나는 탱고를 출 수 있을까. 단절과 증오가 낳은 아름다운 선율에 아진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8.
“당신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봐요.”
피곤이 짙은 음색으로 여자가 말했다. 혜은이 빨래를 하려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이대로 계속 있을 작정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합의금을 지불하면 그만이지 이런 식의 책임을 질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당신 부모도 아무 말 못 하고 합의할 거예요. 매일같이 전화해서 울어대더니, 당신 없어진 걸 알고는 연락하지 않는 걸 보면 당신 부모도 어지간한 사람들 같으니까.”
여자의 목소리에 차가운 냉소가 실려 있었다. 혜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보호자 아니에요. 저는 결혼을 했어요. 그러니까 부모님은 제 보호자가 아니에요.”
“무슨 소리에요? 그럼 내가 당신 남편을 만나 합의를 해야 된단 얘기에요? 남편은 어디 두고 여기 있어요?”
여자가 카랑한 목소리로 혜은에게 되물었다. 혜은은 고개를 숙였다. 거실바닥이 일렁였다. 빨랫감이 후드득 손에서 떨어졌다.

“제 남편은 죽었어요.”
그가 죽고 처음으로 그 사실을 남에게 전하고 있다. 죽었다, 그는 죽었다, 소용돌이치듯 안에서 맹렬한 바람소리를 내는 말을 혜은은 입 밖으로 내었다. 죽다, 그가 죽다, 온갖 종류의 소음이 살아나고 있었다. 죽었다. 그는 죽었다. 말이 밖으로 비져 나오면서 혜은을 둘러싸 흔들어댔다. 혜은은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의식을 놓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자신을 흔들어대는 암흑의 저 멀리서 그가 소리치고 있었다. 의식을 놓으면 안 된다고, 자신을 보라고. 혜은은 그의 목소리를 피해 또다시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여자는 죽을 끓이고 있었다. 가느다란 피아노 선율이 들려 왔다. 그 소리가 그 장면이 부옇고 희미해서 혜은은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 흑단처럼 검은 생머리를 내려뜨린 여자가 쌀죽의 옅은 냄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여자는 주걱으로 천천히 쌀죽을 저었다. 몸을 수그려 불을 낮춘 여자는 싱크대에 놓아진 검은 봉지에서 전복을 꺼내서 잘게 썰었다. 신선한 바다냄새가 물컹하고 쌀죽냄새와 섞이었다.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막해서 피아노 선율처럼 평화로웠다. 혜은은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혜은의 기척을 느낀 여자가 돌아보았다.

“이제 깬 거예요? 의사가 다녀갔었어요. 죽어버리면 내가 곤란해지잖아요. 영양실조라던데요. 거기다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겹쳐서 기절한 것 같다고. 나한테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게 꼭 내가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것처럼 말하더군요.”
혜은은 팔에 꽂힌 링거바늘을 그제야 발견했다.

“당분간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길고 서늘한 눈매에 웃음기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조금의 틈이 흔들리고 있었다. 혜은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는 입을 앙다물고 다시 몸을 틀었다. 잘게 썬 전복을 프라이팬에 올렸다. 참기름 냄새가 더해지고 자글자글한 소리를 내며 여자는 전복을 볶았다.

“사고내고 피해자 끌어다 죽인 꼴 될까봐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합의할 사람도 없어지고 감옥 가게 생겼으니까. 밥 먹고 합의금이나 생각해둬요, 영양실조니 정신적 스트레스니 전부 사고랑은 상관없는 것 같으니 괜히 사기 칠 생각은 말고요.”
전복죽이 진해지는 냄새를 맡으며 혜은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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