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입상작]

전화벨이 날카롭게 울렸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귀를 막았지만 전화 벨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불 밖으로 손만 뻗어 휴대폰을 찾아서 베개 밑에 넣었다. 소리는 한결 작아졌다. 곧 전화벨이 끊겼다. 하지만 5초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눈을 뜨지 않은 채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김형사님, 사건입니다. 빨리 오세요.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는 살인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유쾌한 소식은 아니었지만 워낙 익숙한 일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채비를 했다.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양말을 신으려는데 빨아놓은 게 하나도 없었다. 급한 마음에 편의점에 들러 살 생각을 하며 맨발로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사망자는 정희진, 32세의 여자입니다. 사망 추정 시간은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이틀 이상은 된 것 같습니다. 최초 목격자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오전 다섯 시 삼 십분 쯤에 발견하고 신고했다고 합니다. 나는 장형사의 사건 보고를 들으며 현장을 둘러보았다. 사체의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넥타이로 목을 매단 채 죽어있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넥타이라니, 무척 어색해 보였다. 몇몇은 사체의 사진을 찍었고 또 다른 무리는 집안을 수색했다. 장형사는 방에서 작은 쪽지를 가져왔다. 그것을 건네며 자살인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쪽지에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다.’ 는 말이 적혀있었다. 나는 장형사에게 쪽지를 돌려주며 말했다. 우선 피해자의 필체와 일치하는지 그것부터 확인해봐.

정희진의 아파트는 방 두 개와 부엌, 거실로 되어 있었다. 방 하나는 침실 다른 하나는 서재로 쓰는 것 같았다. 집은 넓은데 가구는 얼마 없었다. 그나마도 거의 다 거실에 몰려 있어서 방은 더 휑해 보였다. 정리를 잘하는 성격인지 집안이 깨끗했다.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왠지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이 보이기도 했다.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분명히 피해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들었는데 찻잔과 수저 등이 모두 두 개씩 갖춰져 있었다. 세트로 산 것이 틀림없었다. 침대에도 베개가 두 개 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왼쪽이 피해자의 베개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오른쪽에 있는 베개는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머리카락도 없었고 얼룩도 없었다. 부엌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마주 보며 마신 것처럼 식탁에 찻잔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나는 다 마셔서 바닥에 찻물이 눌어붙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조금도 마시지 않았는지 꽉 차 있었다.

“여기 들어있는 게 뭐지?”
“복숭아 홍차입니다.”
검사관은 쓰레기통에서 ‘복숭아 홍차’라고 써있는 비닐 티백을 가져왔다. 피해자가 자주 마시던 차인지 그것 말고도 쓰레기통에서 빈 봉지가 여러 개 나왔다. 아직 뜯지 않은 것들도 싱크대 서랍장 안에 있었다. 나는 복숭아 홍차 티백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장형사가 어느새 와서 아는 척 말을 늘어놓았다.
“어? 이거 복숭아 홍차네. 요즘 이거 때문에 다들 난리더만. 우리 마누라도 한 박스 사왔어요. 외로울 때 먹는 거래나 뭐래나. 거 뭐야, 영화배우 이건운가 김건운가 하는 애가 선전하는 거잖아.”

장형사는 복숭아 홍차에서 시작해 마누라 얘기를 한참 떠들어대더니 자살이 틀림없다며 그만 가자고 나에게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타살일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건 10년의 형사 경험이 준 육감이었다. 피해자 옆에 있어야할 누군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그런 느낌 외에도 내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쪽지에 써있는 말이었다. 혼자라는 말은 곁에 있는 누군가의 부재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다. 꼭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혼자라는 이유가 죽을만한 이유냐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내두르며 사건 현장을 나섰다.
경찰서로 돌아와서 나는 정희진의 프로필을 조사했다. 그녀는 명문 대학을 졸업해 대기업의 대리로 근무했다. 미혼이었고 부모는 부산에 살고 있었다. 프로필 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자세한 사정이야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척 보기에도 자살할 이유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점점 더 타살 쪽으로 심증을 굳혀갔다. 꼬깃해진 담뱃갑에서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정희진이 다니던 회사, 대성전자로 향했다.

수사 결과 정희진의 동료 직원들은 거의 비슷한 대답을 했다. 정희진에게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과 그녀에게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는 것.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특별한 기억이 없었다.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7년이나 같이 일했던 동기마저도 그녀를 잘 모르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뭐 그냥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워낙에 직장이라는 곳이 사생활에 대해 캐묻지 않는 게 예의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아무 것도 모를 수가 있나. 나는 혀를 찼다. 그녀에게 애인이나 동거남이 있었냐고 묻자 사람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 그녀에 대해 ‘아마도’인 기억밖에는 없었다.


경찰서로 돌아오자 장형사가 투덜대고 있었다. 장형사는 파트너에게 보고도 안하고 혼자 움직이는 사람이 무슨 파트너냐며 짜증을 냈다.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그냥 장형사의 어깨만 툭툭 쳐주고는 자리에 않았다. 조사해온 내용을 책상에 펼쳐놓고 들여다봤지만 이것만으로는 용의자의 털끝도 건져낼 수가 없었다. 나는 오후에 나갈 탐문 수사 계획을 세우며 잠시 눈을 감았다. 선잠이 들려던 순간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오늘 하루 잠은 다 잤구나 투덜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에서는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아내의 목소리였다.

아내는 오늘이 어머님 생신이라며 늦지 말고 어머니댁으로 오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머니의 생일인 것을 깜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 또한 깜박하고 있었다. 우리는 6개월 째 별거 중이었다. 아내와 나는 2년 동안 연애를 하고 5년 전 결혼을 했다. 연애를 할 때는 내 직업 때문에 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서 애틋했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는 그것이 싸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나마 함께 있는 시간에도 우리는 다투기만 했다. 아내는 일에 지쳐 피곤한 나를 볼 때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나는 그런 아내 때문에 더 피곤해져 날카롭게 대했다. 싸움은 사소한 데에서 시작해 크게 번졌다. 나중에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결국 아내와 나는 별거에 이르렀다.
아내는 옆 동네로 월세를 얻어서 나갔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나갈테니 그냥 있으라고 했지만 아내는 내 흔적조차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별 수 없이 나는 집을 얻었다는 아내의 통보를 받고 보증금을 보내줬다. 나는 아내의 집이 어딘지 몰랐다. 근처 어딘가라고 얘기만 들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거기쯤이 아닐까 짐작은 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혼이 아니고 별거를 결정한 것은 서로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서였다.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날 수도 있으니 아내와 나는 일단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말 것을 합의했다. 그래서 아내는 별거 중에도 시댁 식구들의 경조사를 챙겼다. 아버지의 제사, 형수의 생일, 조카의 돌잔치. 때마다 아내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 형수와 음식을 하거나 어머니의 시중을 들었다. 나는 바쁘기도 했지만 아내와 어색하게 마주치는 것이 불편해서 때마다 늦으막히 갔다 바로 나오곤 했다.

오늘 저녁에도 아내를 봐야 한다는 것 때문에 벌써부터 불편했다. 나는 수사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결국 차를 달려서 내가 간 곳은 정희진의 아파트였다. 경비실에는 처음 현장을 목격했던 경비원이 있었다. 나는 경비원에게 정희진이 누구와 같이 살거나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냐고 물었다. 경비는 그런 사람이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없던 것 같기도 하다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무슨 대답이 그렇습니까. 경비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순찰을 돌아야 한다고 황급히 경비실을 빠져나갔다. 경비의 아리송한 대답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사건의 실마리가 잡힐 듯 하다가도 잡히지 않고 빠져나갔다.

집은 처음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휑한 느낌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어서 그런지 스산한 기운이 집안에 가득했다. 나는 전보다 꼼꼼하게 정희진의 집을 둘러보았다. 세트로 된 찻잔을 찬찬히 살펴봤다. 두 잔의 차를 끓일 때 정희진의 마음이 어땠을까. 빈자리를 보며 홀로 차를 마시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녀가 마시던 복숭아 홍차는 무슨 맛이었을까. 생각하려 했지만 떠오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나는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이해되지도 않았고 그것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찻잔 옆에는 복숭아 홍차 박스가 있었다. 안에는 고무줄과 나무젓가락, 음식점 쿠폰 등이 들어 있었다. 상자의 윗부분에는 웬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무슨 배우인 것 같은데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포근한 인상을 주는 남자 배우는 살짝 미소를 띄우며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당신이 외로울 때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외로울 때는 복숭아 홍차를.’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홍보 문구였는데 분홍색 바탕에 남자 배우의 미소까지 겹치니 뭔가 향긋한 냄새를 떠오르게 했다. 나는 복숭아 홍차의 향을 한번도 맡아보지 않았지만 왠지 그 향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아내가 그새를 못 참고 또 전화를 했나 해서 짜증스러운 손길로 폴더를 열었는데 벨소리가 계속 되었다. 내 휴대폰 소리가 아니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전화벨 소리가 거의 그쳐갈 때쯤 나는 소파 틈새에 끼어있던 휴대폰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정희진의 것인 것 같았다. 나는 휴대폰의 부재중 통화 기록을 확인하며 발길을 돌렸다.

내가 어머니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족들이 식사를 마친 뒤였다. 아내는 설거지를 하다가 나를 보고는 못 본 척 다시 설거지감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가족들은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나는 혼자 식탁에 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냉장고를 열어 과일을 꺼냈다. 나는 아내에게 언제 왔냐고 물었지만 아내는 아무 대답 없이 과일을 챙겨 거실로 나가 버렸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아내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런 말없이 운전만 했다. 무언가 말을 붙여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얘기가 없었다. 아내는 지하철역을 보자 그곳에 내려 달라고 했다. 나는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차를 세우자마자 아내는 굳은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걸어서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아내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의 뒷모습이 무척 어색해 보였다.

집에 돌아온 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집안이 엉망이었다. 빨래는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고 설거지감도 싱크대에 쌓여 있었다. 모든 게 귀찮았다. 하지만 더는 그냥 둘 수 없어서 침대에서 일어나 세탁기부터 돌리기 시작했다. 세탁기야 빨래 넣고 버튼만 몇 개 누르면 됐지만 설거지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한숨만 내쉬다가 천천히 그릇을 닦아 나갔다. 마지막 그릇까지 닦아 건조대에 넣고 싱크대를 닦았다. 행주를 찾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잘 개어져 있는 행주 몇 개와 복숭아 홍차가 있었다. 아내도 이걸 마셨나? 복숭아 홍차가 들어있는 싱크대 서랍 안이 마치 사건 현장처럼 느껴졌다.

대충 집안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아까 봤던 아내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내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나는 그것을 결혼하기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큰 문제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내는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사람들에게 집착했는데, 나는 여자들은 다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내의 주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친한 친구가 둘 있었는데 그 마저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연락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 둘을 빼면 아내에게는 가까운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바빠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모른 척했다.

처음에 나는 아내의 외롭다는 말이 걱정도 됐다. 어떻게든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의 그 말이 지겹게 느껴졌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언제, 어떻게 생기는 감정이고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시간이 많아서 저런 사치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내성이 생겨 아내가 걱정되기보다는 짜증이 났다.

어느 날 아내는 굳은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휴일에 편하게 쉬려던 나는 아내의 그런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하지만 아내는 이런 내 표정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말을 했다. 아침에 나는 당신 등을 보면서 깨. 그리고 나서 아침밥을 하지. 그런데 해봤자야. 당신은 늦었다면서 식탁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는 때가 더 많으니까. 당신이 나가면 나는 혼자 남아서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 그러다 점심때가 되면 아침에 해놓았던 식은 밥과 반찬을 혼자 먹어. 밥을 먹고 장을 보고 저녁상을 차리면 당신은 전화하지. 오늘은 늦을 것 같다고. 그럼 나는 또 혼자서 당신의 빈자리를 보면서 저녁을 먹어. 설거지를 하고 차를 끓이는데 내가 미쳤는지 당신이 안 올 걸 알면서도 꼭 두 잔을 끓이게 되는 거야. 두 잔의 차를 마시면서 내가 얼마나 쓸쓸해지는 줄 알아? 하루 종일 아무하고도 말 한 번 못하는 날도 있어. 나 당신하고 왜 결혼했니?

아내의 말에 당황해서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는 아내를 달래려고 농담도 하고 우스운 춤도 춰보았지만 아내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내가 집을 비운 동안 아내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 한 적조차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잘 지내겠거니 하고 생각한 게 다였다. 함께 살고 싶어서 결혼했는데 함께 사는 것 같은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내의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서 아내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식욕도 거의 없었다. 나는 집밖으로 나오려하지 않는 아내를 다그쳐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원에서는 아내에게 우울증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치료를 받는 동안 아내는 멍한 눈빛이었고 가끔 서럽게 울었다. 그러면 나는 아내를 안아주지도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어떻게든 아내의 문제를 해소해줘야 했기에 나는 고민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 갖자. 어떤 말에도 반응이 없던 아내였는데 그 말에는 기뻐했다. 그때는 모든 일이 다 해결된 것만 같았다. 아이가 있으면 아내가 혼자 있을 시간도 없을 테고 바빠지면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안 하게 되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좀 더 집에 마음을 붙일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잠을 설쳤더니 아침에 일어나자 몸이 뻐근했다. 장형사가 내 피곤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넸지만 나는 일이나 하라며 핀잔을 주었다. 김형사님, 정희진 부검 결과 나왔습니다. 사망 추정 시각은 9월 25일 23시에서 9월 26일 03시 사이. 사인은 넥타이로 인한 질식사.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인데 넥타이가 있다는 것도 좀 그렇고 그것보다 피해자의 목에 누군가 손으로 조른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답니다. 이건 좀 더 조사를 해봐야 안다는데 모레쯤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나는 속으로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며 쾌재를 불렀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피해자의 휴대폰을 지그시 쥐었다.

정희진의 휴대폰에는 200개도 넘는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수신함을 채우고 있는 번호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김진우라는 남자였다. 나는 휴대폰 위치 추적으로 김진우의 집과 회사를 알아본 뒤 수사 영장을 준비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유일한 용의자였다. 또한 나의 온갖 세포가 그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사건 자료보다도 나의 육감을 더 믿었다. 지금까지 수사 해왔던 것들을 파일로 정리하고 김진우를 수사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나는 김진우의 퇴근 시간에 맞춰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말쑥한 차림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김진우씨 되십니까. 경찰입니다. 정희진씨 아시죠? 정희진씨 관련해서 조사할 내용이 있으니 잠시 경찰서에 함께 가주시길 바랍니다. 김진우는 아무런 동요 없이 알겠다며 나를 따라나섰다. 김진우가 아무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은 그를 흘깃 보았다. 그는 가만히 있다 창 밖을 보며 말했다.

“그 여자 죽었나요?”
나는 놀라서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정희진이 죽었다는 말이나 비슷한 뉘앙스를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정희진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때문에 더 의심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범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알았죠?”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김진우의 말투는 심드렁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차에 있는 내내 나는 김진우의 눈치를 살폈고 그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차창만 내다보고 있었다. 경찰서로 들어와 나는 그를 데리고 취조실로 갔다. 그는 어떤 것에도 반항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는 나의 물음에 모두 무심히 대답했다. 이름은? 김진우. 생년월일? 1974년 9월 24일. 정희진과 동거한 사실이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디서 얼마간 했습니까. 그 여자네 집에서 다섯 달 정도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은 정희진과 헤어진 상태입니까. 네, 저번 달 중순쯤에 헤어졌고 집을 나왔습니다. 헤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헤어지는 이유야 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식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죽였나? 보통 이렇게 물었을 때는 흥분해야 정상인데 김진우는 전혀 감정의 변화 없이 차분히 대답했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태도에 흥분한 건 도리어 나였다. 나는 김진우의 멱살을 잡고 퍼부어 댔다. 너는 9월 24일 밤에 정희진과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어. 왜냐면 그날이 너의 생일이기 때문이지. 너는 그날 정희진을 만났고 목을 졸라 죽인 뒤 넥타이로 자살처럼 꾸며놓은 거야. 왜 죽였지? 다른 여자가 생겼기 때문인가? 아니, 왜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정희진을 죽였다는 게 중요하지.

김진우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사건에 대해 저보다도 훨씬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 범인은 제가 아니라 형사님이겠네요.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으니. 저는 정희진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동거하는 동안에도 처음 한 달을 빼고는 그 여자랑 같이 잔 적도 없고 어딜 가본 적도 없습니다. 단지 집을 구할 동안 시간이 필요해서 그 집에 살았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9월 24일에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알리바이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날 밤새 친구들과 술을 마셨으니까요. 같이 술 마신 친구들, 술집 사장과 종업원들 이걸 다 합치면 증인으로 열 명도 넘을 겁니다.

나는 김진우의 멱살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용의자 앞에서 흥분해 날뛰는 형사라니 최악이었다. 그래, 죽이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럼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평소 정희진이 했던 행동 중에 이상했던 건 없었습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우울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자주 숨이 막힌다고 얘기했는데 그럴 때면 이상하게 자기 목을 졸랐어요. 정희진이 죽을 거라는 예상은 어떻게 했습니까. 뭐, 한동안 계속 연락이 안 되기도 했고 워낙 우울증이 심했으니까. 그 여자 같이 사는 동안에도 좀 무서웠거든요. 집착도 심하고 감정 기복도 심하고. 언젠가 일 나겠구나 싶긴 했어요, 항상.

김진우를 보내고 나는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김진우는 동거한 건 다섯 달뿐이기는 했지만 정희진을 만나온 건 거의 5년이 다 되어 간다고 했다. 결혼 생각도 했지만 사정이 있어서 미뤄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착잡해졌다. 수사고 뭐고 아무 것도 될 것 같지 않아서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들어가자마자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오랫동안 빨지 않아서 이불에서도 베개에서도 고약한 냄새가 났다. 게다가 베개 속 부적 때문에 나는 부시럭대는 소리도 오늘따라 무척 신경 쓰였다. 부적은 예전에 아내가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나는 청소를 하기 위해 베개 커버와 침대 커버를 다 벗겨냈다.

아이를 갖자는 말에 우울증이 나아졌던 아내는 본격적으로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피임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에게는 결혼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기다렸지만 그리고도 한참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아내는 불안했는지 병원에 가기를 원했다. 나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아내를 말렸지만 결국 병원에 가고야 말았다. 의사는 큰 문제는 없으나 정자가 약해서 수정되기 전에 죽는 게 많다며 좀 더 기다려보라는 말을 했다.

마음이 급해진 아내는 기다리지 못하고 아이를 갖기 위해 애썼다. 아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를 했다. 매일 성당으로 새벽 기도를 나갔고 집에 돌아와서도 하루의 반 이상은 기도를 하는 것으로 보냈다. 나는 그런 아내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TV의 음량을 높이는 만큼 아내의 기도 소리도 높아져 갔다. 하지만 기도는 얼마 가지 못했다. 기도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아내가 다음으로 했던 것은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아내는 하루에도 몇 장씩 부적을 사왔다. 부적은 현관에도 붙어 있었고 식탁에도 붙어 있었다. 온 집안에 부적이 있었다. 아내는 부적은 베개 속에도 넣고 옷장 속에도 넣었다. 심지어는 내 속옷에도 넣으려고 했지만 내가 화를 내는 바람에 그것만은 하지 못했다. 나는 아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다.

그러던 아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은 시험관 아기였다. 시험관 아기를 하면서 아내는 눈에 띠게 힘들어했다. 처음 실패했을 때만 해도 아내는 괜찮았다. 대부분 처음에는 다 실패한다면서 다음에는 성공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시험관 아기가 또 실패를 하면서 아내는 힘들지만 그래도 해보겠다는 의지는 버리지 않았다. 세 번째까지 실패로 돌아가면서 아내는 좌절했다. 그런데 나는 아내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지는 못할망정 가시 돋힌 말만 했다. 네 번째 시험관 아기마저 실패하면서 아내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아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는 빨리 포기했으면 하고 바랐는데 막상 아내가 그만두고 맥없이 앉아있으니 나까지 지쳤다.

아내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한 동안은 외출도 하지 않고 집안에만 있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별로 자지 못했다. 나는 우리 둘만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지만 아내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 말을 하는 나 또한 위로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밤마다 울었다. 그리고 나는 우는 아내를 모른 척 했다. 처음에는 모른 척하면서도 마음이 아팠지만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내가 우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고 관심 갖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한 집에 살면서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잠도 따로 자고 밥도 따로 먹었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라리 둘 다 떨어져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멍하니 부적을 바라보았다. 버릴까 하다가 그냥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커버를 벗긴 까칠까칠한 베개를 베고 누웠다. 까칠한 촉감 때문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나는 뒤척이다 내 베개 대신 커버가 씌워진 아내의 베개를 베고 잠을 청했다. 베개에서는 아직도 아내 냄새가 났다.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개운한 몸으로 출근했다. 장형사는 쪽지의 글씨가 피해자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보고를 했고 목에 있는 손자국이 피해자의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우가 말한대로 였다. 힘이 빠졌다. 정희진에게 혼자 남는 건 숨이 막히는 일이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조를 때 그녀의 기분은 어땠을까.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누가 죽였을까, 가 아닌 그녀가 왜 죽었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 죽였든 그녀 스스로 죽었든 ‘왜’라는 이유는 있을 터였다.


나는 사건 파일을 뒤져 가장 의심이 가는 것부터 다시 조사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가장 의혹이 풀리지 않는 것은 복숭아 홍차였다. 나는 인터넷에 들어가 복숭아 홍차를 검색했다. 제일 위에 TV 광고가 떴다. 광고 첫 장면은 비어 있는 집이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문을 열어봐도 침대만 보였다. 또 다른 방문을 열어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통 광고에서 쓰이는 배경 음악도 없었다. 사람이 없는 부엌에서는 물을 끓이는 주전자만이 삐익, 소리를 낼뿐이었다. 어떤 여자의 손이 주전자를 들었다. 복숭아 홍차 가루를 넣고 저었다. 여자는 복숭아 홍차를 코에 가까이 대 냄새를 맡아보고 식탁에 앉았다.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여자가 복숭아 홍차를 마시는 순간 화면은 환해지고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여자의 앞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놀란 여자에게 남자는 말한다. 당신의 외로움을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외로울 때는 복숭아 홍차를 드세요. 제가 당신의 곁에 있을게요.


여자와 남자는 행복한 표정으로 복숭아 홍차를 마신다. 그게 광고의 다였다. 그리 좋은 광고 같지는 않았지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 배우가 한 몫을 단단히 한 것 같았다. 남자 배우는 요즘 이삼십 대 여성에게서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신인이라고 했다. 특별할 것 없는 광고였지만 남자 배우의 미소와 ‘외로울 때는 복숭아 홍차를’ 이라는 문구가 꽤 중독성 있게 느껴졌다. 나는 광고를 몇 차례나 돌려보았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수사는 나아가지 않고 멈춰 있었다. 자꾸 아내 생각이 났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내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계속 싸매고 있어봤자 나아질 것도 없을 것 같아서 정희진의 집으로 갔다. 모든 진실은 사건 현장에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아파트는 며칠 동안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엷은 먼지가 끼어 있었다. 나는 갑자기 정희진과 같은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제일 먼저 했던 건 그녀가 잠을 잤던 침대에 누워보는 것이었다. 나는 침대 중간에 눕지 않고 정희진의 베개가 놓여진 침대 왼쪽에 누웠다. 왠지 정희진도 그랬을 것 같았다.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 거실로 나갔다. 무관심한 눈빛으로 TV를 보다 채널을 몇 번 돌리고는 꺼버렸다. 부엌으로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반대편 의자를 보면서 물을 한잔 마셨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이상하게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희진의 외로움과 아내의 외로움이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일까.

나는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했다. 집에 들어오니 쌓여있던 피로가 온 몸으로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거운 몸을 움직여 대충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는데 작은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을 열었다. 작은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기억하기 싫었던 그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날도 오늘처럼 나는 일찍 퇴근했다. 오랜만에 아내와 저녁을 먹기 위해 샤워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에 앉아서 신문을 보는데 자꾸만 작은 방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아이의 울음소리 같았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겠지 하고 무심히 넘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들렸다. 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방에서 무슨 소리 안 나냐고 물었지만 아내는 모르겠다며 저녁 준비만 했다. 나는 점점 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었을 때 내 염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갓난아기가 아기 침대에 뉘어져 있었다. 아기는 배가 고픈 듯 칭얼대며 울었다. 아기 옆으로 빈 우윳병과 딸랑이가 보였다.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아내는 아기가 우는 소리에 들어와서 아기를 안고 달랬다. 나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내에게 물었다. 이 아기 어디서 데리고 왔어. 아내는 아무런 대답 없이 아기에게 빈 우윳병을 물렸다. 나는 결국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내는 여전히 한 마디도 없었고 아기는 더 크게 울어댔다.

나는 경찰서에 연락해 아기를 그곳에 맡겼다. 아기의 부모는 아파트 옆 동의 젊은 부부였다. 아기의 엄마는 잠시 유모차를 세워두고 짐을 챙기는 동안 아기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녀는 울어서 부은 얼굴로 아기를 받아 안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아기의 아빠가 고소하겠다며 화를 내고 아기의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을 때 아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기의 부모에게 빌고 빌어서 겨우 없었던 일로 정리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나는 아내를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만약 아내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아내는 외로워서,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으로는 아무런 대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상태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기 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리 외롭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아이를 훔쳐오는 것은 이해를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내는 더 이상 내 앞에서 울지 않았다. 아내와 내가 별거하는 과정은 꽤 수월했다.

그 뒤로도 왠지 씁쓸한 기분에 작은 방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생각에 빠져 멍한 채로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나는 얼른 작은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아직도 작은 방은 왠지 안 좋은 기운이 맴 도는 것 같았다. 전화는 장형사의 것이었다. 넥타이 샀던 백화점에 알아봤는데 그거 남자 친구 주려고 샀던 거라는 데요? 포장까지 해갔다고 직원이 똑똑히 기억하더라고요.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정희진은 아마도 김진우의 생일 선물을 샀던 것이겠지. 상을 차려놓고 김진우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을 거야. 그 넥타이가 김진우의 목이 아닌 자기에 목에 감길 줄은 몰랐겠지. 뭔지 모를 씁쓸함이 내게 밀려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사했던 파일을 모두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혼자 남겨진 것 같다는 쪽지, 피해자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조른 흔적, 주변 사람들의 증언, 김진우의 증언 그리고 두 잔의 복숭아 홍차. 이 사건이 타살이든 자살이든 간에 나는 정희진이 정말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블 침대 왼쪽에서 자고 두 잔의 차를 끓여 혼자만 마시는 사람, 가까운 친구도 없고 오로지 조용하다는 것으로만 기억되는 사람, 가장 가까운 애인마저도 곁에서 잃어버린 사람. 그녀가 바로 정희진이었다. 나는 사건을 맡은 뒤 처음으로 정희진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했다.


나는 복숭아 홍차를 끓였다. 정희진과 내 아내, 그리고 외로운 사람들이 찾는 복숭아 홍차의 맛이 궁금했다. 복숭아 홍차에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그 향은 아내에게서 나는 향과 비슷했다. 나는 뜨거운 복숭아 홍차를 불어 가며 조심스럽게 마셨다. 예상했던 것보다 맛이 좋았다. 조금은 달고 또 조금은 짠맛이 났다. 정희진이 죽기 직전에 했던 행동이 떠올라 나는 한 잔의 복숭아 홍차를 더 끓여 맞은편에 두고 다시 차를 마셨다. 찻잔은 아내와 내가 결혼하고 처음 샀던 부부 찻잔 세트였다.

차를 마시고 있는데 왠지 집안이 적막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TV를 켰지만 그래도 적막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려워져 라디오도 켜고 세탁기도 돌렸다. 집안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그럼에도 내가 느꼈던 적막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집안은 기계 소리로 가득 찼다. 사람이 내는 소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문득 오늘 내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점점 공기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혔다. 아마도 이런 감정을 외로움이라고 하겠지. 지금까지 아내가 외롭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 하지도 말라며 핀잔을 주었던 게 나였다. 그것은 나를 지켜내려는 나약한 방어막에 지나지 않았다. 정희진만 불쌍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자신이 불쌍하게 여겨져 눈물이 흘렀다. 달던 복숭아 홍차에서 쓴맛이 났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불안해졌다. 나는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이제 기계음도 잘 들리지 않았다. TV와 라디오의 음량을 최대로 높였지만 마찬가지였다. 아아, 소리를 내 보았지만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에서 뛰쳐나갔다.

차를 타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시동도 걸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차 안이 너무 좁게 느껴졌다. 산소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엎드렸다.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정희진이 그랬던 것처럼 내 목을 졸랐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콜록거리며 손을 풀었다. 그리고 정희진이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인지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급해진 나는 통화 버튼만을 계속해서 눌러댔다. 여전히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는 아내의 집이 어딘지 몰랐지만 무작정 큰길로 차를 몰고 나갔다. 상점들은 문을 다 닫은 채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가로등 불만이 어두운 길을 드문드문 비춰 주었다. 나는 차의 속도를 줄이면서 천천히 골목을 살펴보았다. 거기쯤이 아닐까 했던 골목으로 접어들며 흠칫 진저리를 쳤다. 코 끝에서 복숭아 홍차의 향이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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