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상해·가흥을 거쳐 하얼빈까지…독립투사들의 발자취따라 6000km 대장정

2006년 광복 61주년을 맞아 전국 대학 신문사·영자신문사·방송사 기자 36명이 8월11일(금)∼18일(금)까지 7박8일간 중국대륙의 항일유적지탐방을 다녀왔다.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
항일유적지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대륙 이곳저곳을 옮겨다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곳은 중경과 상해다.

처음 도착한 도시 중경은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임시정부가 세워진 곳이다. 중경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을 받아 군사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중경에서도 세 번이나 청사를 옮겨다녔는데, 네 번째로 정착했던 연화지 청사에 방문했다.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청사에 비해 인지도가 낮지만 12배나 큰 규모이며 1995년, 4년의 복원작업 끝에 개장했다. 관리인은 일주일에 채 한 팀도 안될 정도로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뜸해 운영이 힘들다고 전했다. 건물 내부는 당시 사용됐던 가구·문서·군복 등이 전시돼 있었다. 잠시 머무르고도 연신 덥다며 부채질을 하다 보니 통풍도 잘 안되는 좁은 방과 작은 책걸상에서 민족의 미래를 염려했을 독립투사들의 고충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연화지 청사의 작고 허술한 모습에 적잖이 실망했던 우리,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장소는 김구선생이 백범일지 하권을 저술했다는 오사야항 청사다. 한 10여분 걸었을까, 작은 골목길에서 갑자기 가이드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오사야항 청사입니다.” 기자단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변변한 입구도 없고, 형체도 남아있지 않아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목조 건물만 눈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건물이 오사야항 청사임을 알려주는 것은 낡은 기념비가 전부였다. 계속되는 기자들의 탄식에 국가보훈처 천지명 지도교수는 “92년 중국과 수교 이전에는 유적의 상황조차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훼손된 것이 많다”고 말했다. 또 국가차원의 중국내 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 및 보존·복원 사업이 가능해진 후 부터 항일 유적 보존에 힘쓰고 있지만 우리 영토가 아니라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눈앞에 보이는 비석이 전부이기 때문에 더는 둘러볼 것도 없었다. 더운 날씨에 유적지에 대한 충격까지 더해져 기자단은 묵묵히 다음 장소로 향했다.

중경시내 중심부 미원식당. 임시정부의 국군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옛 터가 있는 곳이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광복군의 총사령부가 중국 군사위원회와의 협정, 지원문제를 의논하던 곳이 지금은 일개 식당 내부의 작은 계단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허름한 건물의 2층이다. 어두운 복도가 남아있는 흔적 전부였다. 총사령부 옛 터임을 알 수 있는 어떠한 표지판도 남아있지 않았다.

첫날부터 너무 가혹했다. 그러나 이는 긴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날 우리가 중경에서 두시간 즈음 달려 도착한 곳은 가흥 매만가 76번지, 일제 검거를 피해 김구 선생이 피신한 곳이다. 건물 입구에는 ‘대한민국 김구선생 항일시기 피난처’라고 쓰여있고, 비상탈출구가 있는 김구선생의 2층 침실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용하고 인적 드문 가흥에 한국 관광객들이 찾을 리 만무했다. 피난처는 우리가 오기 전까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세종해외관광 한상준 대표는 한국 관광객들은 볼거리 많은 관광지를 택하지 유적을 보기 위해 중경에서 두 시간씩 걸려 이곳에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좀 멀고 고생스럽더라도 이런 항일 유적지를 자주 찾아야 계속 보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경에서의 탐방을 마친 후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이동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게 느껴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 청사. 먼저 도착한 한국인들이 많아 줄을 서서 관람했다. 사진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노! 노!”를 외치는 중국 관리인들과 밀려드는 관광객이 중경의 유적지와 대조됐다. 상해 청사는 방문객에게 비닐 덧신을 신게 하는 등 관리에 신경쓰기 대문에 중국 항일유적지 중 가장 보존이 잘 돼 있고 많은 사람이 찾는다. 각 방마다 스피커를 통해 유물을 설명하고 상해 청사 모형 같이 눈길을 끄는 전시물도 있다.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의사들의 흔적
현재 ‘노신공원’으로 바뀐 홍구공원은 1932년 4월29일 일본 천황 생일축하 의식 현장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곳이다. 윤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호를 딴 ‘매원’이라는 곳이 홍구공원 내에 있다. 이곳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것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이라는 것. 도시락 폭탄은 자폭용으로 가져간 것인데 사용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체포됐다.

상해를 떠나 북쪽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하얼빈. 안중근 의사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도시다. 다행히 시내에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이라는 곳이 설립돼 그가 하얼빈에 머물렀던 11일간의 행적을 자세히 찾아볼 수 있었다. 일지 형식의 안내문과 주요 사건 조형물들이 1909년 10월 말 하얼빈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지게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던 하얼빈 역에 갔다. 총을 쏜 장소는 삼각형, 히로부미가 총을 맞은 장소는 사각형 모양의 타일로 표시돼 100여년 전 역사의 현장을 말해주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여정은 총 27년이다. 27년 역사를 겨우 7박8일간으로 짐작하기는 힘들다. 남아있는 터라도 눈으로 확인하고 항일정신을 느껴보는 것이 자손들로써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 아닐까.

수교이후 중국에 가는 여행객이 많아지고 있다. 백두산을 오르고 국제도시 상해에 가서 유람선을 타고 서커스를 본다. 중국의 관광지를 보는 것도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방치된 항일유적지를 중국정부가 관리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여행일정 중 이런 유적지를 방문하는 것은 어떨까. 먼 훗날 광복 100주년 기념 탐방단은 아쉬움 대신 자랑스러움을 더 많이 느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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