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는 생리통이 무척 심하다. 진통제는 생활필수품이다. 그나마 약을 먹고 나으면 다행이다. 다른 친구는 약이 몸에 안 맞아 매달 생고생을 한다. 생리통 상담을 받으러 가봤자 돌아오는 것은 진통제뿐이다.


만약 남자들이 월경을 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미국의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을 빌리면, 의사들이 심장마비보다 생리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국립월경불순연구소’가 설립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차별이 줄었다지만 의학계만큼은 예외로 보인다. ‘왜 한 달에 한 번씩 배를 잡고 구르는 우리의 고통을 몰라주는거야!’라며 투정 부리는 게 아니다. 생리통뿐만 아니라 자궁 관련 질환에 대한 오진으로 고생하거나 치료를 받아도 부작용에 시달리는 안타까운 사례가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려온다. 여성은 ‘증상증후 및 불명확한 병태’로 인한 사망이 13,408명으로 남자(9,799명)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통계자료도 있다. 자신의 병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여성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이렇게 여성에 대한 치료가 상대적으로 허술한 이유는 지금까지 질병 및 치료에 대한 연구가 남성 위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이전에 교육을 받은 의사는 대다수가 남자였고, 임상 실험 대상 역시 남성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현대의학은 생식기를 제외하고는 여성이 남성과 생물학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고, 약간 변형된 ‘작은 남성’과 다름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똑같은 치료법을 적용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아스피린에 관한 연구가 단적인 예다. 아스피린은 보통 심장병이 발병할 위험을 낮춰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결과는 1980년대 남성만을 상대로 한 복용 실험에서 나온 것이다. 1990년대 들어 다시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아스피린이 여성의 심장마비와 관련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심장마비의 위험을 낮추기 위해 아스피린을 복용해온 여성에게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의학 분야에서도 여성들이 낮은 지위에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래 등장한 ‘성(性)인지의학’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메리엔 리가토 박사가 창시한 ‘성인지의학’의 핵심은 남성 환자와 여성 환자의 차이를 인식하고 이에 맞춰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지의학에서 밝혀낸 내용을 살펴보면 ‘남성에게는 심박을 안정시켜주는 약물이 여성에게는 부정맥을 유발할 수 있다’·‘여성의 침 성분은 남성과 달라 충치나 잇몸 질환이 더 잘 생긴다’·‘여성은 남성보다 우울증을 예방하는 물질을 52% 적게 생산한다’는 등 남녀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여성은 그 차이를 고려 받지 못하고 치료를 받아 왔는가. 지금이라도 이와 같은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인지의학이 꼭 여성만을 위한 페미니즘의 학문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 각각에게 보다 적합한 치료법을 찾으려는 의학이다. 때문에 여성뿐만이 아닌 남녀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2005년 9월 한국성인지의학회 창립총회가 본교 의대에서 열렸다. 의학계에서 성인지의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결과일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90년대 초부터 여성건강연구실을 설치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을 추진하는 등의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시작은 그보다 늦었지만 더욱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쳐 질병 치료에 관한 여성들의 권리를 하루빨리 높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열심히 고통을 호소해도 의사로부터 속 시원하게 답을 듣지 못했거나, 심지어는 ‘엄살 부리지 말라’는 식의 완곡한 꾸지람을 들었던 수많은 여성 환자들이 이제 웃으며 병원 문을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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