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령 교수(철학 전공)

그림의 중앙에는 눈을 가린 벗은 여인이 당당히 서있다. 그녀는 벗었지만 벗지 않았다. 벗은 몸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검은 모자와 장갑, 꽃무늬가 그려진 긴 스타킹은 성장(盛裝)을 준비한 듯 몸을 장식하고 있고, 허리에 둘려진 푸른 리본 또한 인상적이다. 가려져야할 곳(?)은 당당히 드러나 있지만 의상 소품들이 테두리처럼 몸을 장식하고 있는 이 누드는 도발적이다. 주위에는 상징적인 도상들이 흩어져있다. 눈을 가린 여인의 손은 앞서 걷고 있는 돼지의 목줄을 잡고 있다. 여인의 발밑은 조각, 음악, 시 그리고 회화를 상징하는 신들이 부조된 석조물이 떠받치고 있다. 이 예술의 신들은 왠지 의기소침해 보인다. 하늘에는 천사들이 떠 있지만 그들 또한 외면하며 괴로워하는 듯하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 벨기에 화가 펠리시앙 롭스의 채색 판화 “창부정치갚이다.


이 그림을 우리는 현재 진행 중인 한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펠리시앙 롭스와 에드바르트 뭉크 두 작가의 판화를 중심으로 기획되었는데, 각종 매체들은 이 두 작가의 작품들에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는 공통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소개한다. 팜므 파탈, 치명적인 매력으로 유혹하는, 그러나 그 유혹에 빠진 남자를 파멸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녀. 실제로 롭스 판화의 주인공들은 도발적인 여자들이다. 과잉된 성욕의 환유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팜므 파탈이라는 여성 재현의 코드는 19세기 말 유럽 문화의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동등한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주의 운동, 사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회의 가시권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여성들은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창부정치인”은 이러한 위기의식을 담고 있다. 롭스와 같은 시대에,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성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요구하는 법을 배워 마침내 이러한 존중의 표시를 모욕으로까지 받아들이고 권리의 쟁취를 위해서 나서고 심지어 투쟁하기까지 하려한다. 실로 여성은 품위를 잃어가고 있다. (…) 그녀는 남성에 대해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되고, ‘두려움을 모르는’ 여자란 여자다운 본능들을 포기한 여자이다.”


롭스 판화의 여자들은 특정한 관념적 시선에 의해 포착되어 있다. 사탄과의 결탁, 뻔뻔한 유혹, 죽음의 그림자. 롭스가 드러내는 공포는 여성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남성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한 공포이다. 두려운 것은 여성의 존재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향한 자신의 폭발하는, 또는 좌절당한 욕망이다. 그 욕망이 결과할 파멸과 죽음에 대한 강박증적 공포를 강화했던 것은 당대의 성 담론과 ‘매독’이라는 질병이었다.


팜므 파탈의 재현에서조차 여성은 욕망의 주체가 아니다. 19세기 부르주아 성윤리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성들을 파멸시키는 성욕의 화신, 악녀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녀들은 사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도착적이다. 남성은 그를 매혹하는 여성에 사로잡혀 자신의 이성과 통제력을 상실하지만, 여성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사탄의 희생물이 된다. 롭스의 그림은 사탄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는 여자의 몸을 묘사하고 있다. 여성의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사악한 본성을 경고하는 이 그림들은 여성의 몸에 행해지는 가학적 폭력을 묘사하는 오싹한 에로티즘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조차 한다.


이 재현물들 안에 남성 판타지의 반영물이 아닌 여성-존재는 있는가? 롭스와 뭉크의 판화를 모아놓은 이 전시의 제목은 아주 지루하게도 평범한 ‘남자와 여’인데, 그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여기에는 여성이라는 타자에 의해 반영된 남성성이 여성혐오의 시대의식과 버무려져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여성은 어떠어떠한 존재이다’라는 남성중심적 규정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그 규정이 여성 존재의 병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규정하는 권력’의 병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부정적 재현물’을 다른 시선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팜므 파탈의 재현물들 안에서 우리는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순응적인 ‘가정의 천사’라는 주문을 깨뜨리고 가부장적 질서의 밖으로 몸을 던진 ‘사악한’ 여성들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문화사에서 ‘팜므 파탈’과 같은 재현 코드는 낯설다. 그러나 인터넷에 넘쳐나는 ‘**녀’와 같은 도착적 규정의 홍수 속에서, 재현의 권력에 대해 숙고해볼만 하다. 19세기 여성에 대한 남성 공포와 혐오의 미적 승화, 롭스와 뭉크의 판화 전시는 아름답고도 아늑한 덕수궁미술관에서 10월 22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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