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안되겠다.

쉽게 쓰러지면 도저히 억울해서 안되겠다.

 …라고 생각했다.

나이 스무살이 훌쩍 넘은 처녀가 팔자에도 없는 교정을 하게 돼서, 요즘 나는 치과를 들락거린다. 교정 치료는 개인 치과가 아닌 종합병원 외래 진료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실상 아픈 것도 하나 없으면서 그 큰 병원을 한 달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 일’은 바로 오늘 아침에 일어났다. 지지난주 발치 수술을 받느라 화요일 수업을 깔끔하게 결석한 관계로, 나는 진단서를 끊었다. 진단서 끊는 것도 다 돈이어서, 나는 발급비 1만원을 아까워하며 수납창구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음독 맞으시죠?”

내 앞에 서있던 여자와 접수창구의 대화가 내 귀에 선명히 들려왔다.

“네? 뭐라구요?”

“아, 음독 맞으시냐고요”

“…네?”

두 사람의 위태로운(적어도 내가 받아들이기엔 충분히 위태로웠다) 대화가 2번쯤 계속됐다. 그리고 납부 창구의 직원은 답답한 듯 이 대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자살하시려고 독극물 마신거 맞죠? 그렇죠?”

“네….”

“그러면 환자분은 보험처리가 안됩니다. 총 47만7천원입니다”

“알겠습니다….”

내 앞에 서있던 여자는 힘없이 대답했다. 아마도 그녀의 남편이나 혹은 자식이 음독자살을 기도했겠지. 나로서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깊고 어두운 심정을 헤아릴 길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일개 업무거리나 짜증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것도 이미 수차례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확인사살을 해선 안된다는 것쯤은. 이런 대화를 내가 이토록 자세하게 기억하는 것은 모두 그 친절하신 창구 직원분의 배려덕분이다. 소곤소곤 말해도 충분히 불쾌할만한 대화였으나, 직원은 차례를 기다리던 대부분의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죽으면 안되겠다.

쉽게 쓰러지면 억울해서 도저히 안되겠다.

 어떤 사람은 아픈 사람의(아마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플 것이라 생각된다) 사정 따위에 관심도 없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한다. 분명 나는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살아난 그 누군가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다.

 그러나 엄살을 좀 부리자면, 나도 사실은 많이 힘들다. 지난 학기 심신을 모두 바쳐 ‘올인’했던 수습시절이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 때의 열정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이런 생각도 해본다. ‘열정이라는 것은 본래 휘발성 물질인가?’ 지금은 어떤 동력으로 내가 움직이는지 알 수 없고, 그저 살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모두 손에서 놓고 싶었다. 타인의 시선에 그토록 민감한 내가, 다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타인의 자의적 해석은 상관하지 말고 ‘내 한 몸 살고보자고’.


그러나 역시 안되겠다.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에게 모멸감을 준다면(그 창구 직원처럼)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이미 일어나버린 뒤에는  ‘해석의 권리’를 사건의 내막을 아는 일부 사람에게만 한정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만약 내가 엉망인 채로 무너진다면 나는 분명 온갖 종류의 아픈 해석을 견뎌야 만하겠지.

 오늘 아침에 내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동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약간의 체념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얼굴 가득 쉽게 지워지지 않는 조소를 머금은 채. 

그래, 

견딜 수 있는데까지 견뎌보는 거다.

이해를 바란 적도, 기대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수는 없지. 나 자신에게 이기적으로 충실한 것도 중요하지만, 죽을 만큼 힘들지도 않은데(!) 이렇게 초라하게 무너질 수는 없지.

 도에 지나치는 다짐은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간절한 자기 최면과 적당히 작은 다짐을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허풍떨지 않고 말하건데, 더 이상은 무너지지 않으리.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