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으로 보는 총학 변천사
시대의 흐름으로 보는 총학 변천사
  • 이화영 기자
  • 승인 200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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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경제회복 운동과 학원탄압 반대 등 시대상 반영한 활동 많아
‘학도 호국단?’ 70년대 군사정권 당시, 총학생회(총학)의 정식 명칭이다. 정부는 총장을 대학교 학도호국단 단장으로 지정해 대학을 전국 단위의 군사편제로 만들었다. 역할 역시 ‘학생을 위한’ 학생회가 아니었다. 반공교육은 물론 향토 방위 훈련, 근로 봉사 등으로 이뤄졌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헌신할 수 있는’ 학생을 만들고자 했다. 후에 4.19 혁명으로 해체됐다가 75년 전국대학총장결의에 따라 재발족되었고 이후 1985년 폐지돼 학생자치기구, 지금의 총학으로 대체됐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활동도 눈에 띈다. 경제회복을 위한 절약과 저축을 골자로 한 ‘사랑의 운동’과 임신·피임 등 가족 계획을 주제로 한 특별 강연이 그것.
그러나 73년 11월, 총학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학원 탄압과 독재에 대항해 ‘민주체제 확립’을 주장하며 결의문을 발표하고 구속학생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70년대 총학이 새롭게 시작한 사업은 육상대회. 학내 학생들의 운동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따라 개인경기 6종목과 단체경기 총 7종목으로 육상대회를 열었다.
총학은 대외적 활동에도 힘을 모았다. 72년 10월에는 수재민을 돕기 위한 음악경연대회를, 성경과 교양서적 등을 군부대에 기증하기도 했다.
한편 문리대 학생회는 ‘여성과 남성의 구별과 차별’을 주제로 여성 자신의 종속적 관념 탈피와 여성 차별에 대한 특강을 개최했다.
-1980년대, 민주화의 열망이 이화를 뜨겁게 달구다
80년대 총학생회의 주요 활동은 ‘민주화 운동’이었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군사정권과 이에 대한 대학생들의 반발로 80년대는 대학가의 혼란기였다. 총학은 물론 학내 구성원이 민주화 운동의 참여자였다. 84년, 학원자율화조치를 계기로 학생운동이 거세졌다. 학교 정문에는 전경들이 배치됐고 전투경찰과의 몸싸움은 비일비재했다. 총학은 최루가스를 제거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연행됐다. 85년에는 학원 탄압이 극에 달했다. 당시 본교 총학생회장이었던 한신자씨는 구속됐고 이화언론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총학의 우미숙 홍보국장도 지명수배됐다. 또 한혜원 부총학생회장은 강제 휴학을 당했고 김현옥 교육부장은 구속 중이어서 2학기 학생회 운영이 어려울 정도였다.
또 6.10 민주화 운동이 서울 시내 대학가로 퍼져나갔다. 89년 10월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방미를 반대하며 총학 추체의 특별위원회 건설준비위원회를 발족, 안기부와 보안사 해체에 앞장서기도 했다.
­1990년대, 교육투쟁의 시작
90년대는 이화 교육환경 지키기의 시작이었다. 등록금 투쟁은 물론 본교 주변 상업화에 대한 반대시위도 진행됐다. 본교의 등록금이 15% 올랐던 92년, 대학운영이 전적으로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어 등록금이 높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투쟁은 시작됐다. 99년 10월, 등록금에 대한 논의가 가열되자 31대 총학은 이화인 30여명과 함께 총장실 점거 농성을 벌였다. 최초의 총장실 점거 농성이었다. 이 후 총학은 면담을 통해 그 해 2학기 학비 감면액을 14억 확충하기로 했다.
총학은 건강한 대학문화가 아닌 퇴폐·향락 소비문화를 조장하는 신촌 문화축제 반대시위는 물론 신촌민자역사지역 상업화에도 반대목소리를 냈다.
또 본교 채플제도에 문제의식을 느껴, 학교측에 2년 필수·2년 선택제, 채플 시간대 이동, 채플내용의 대양화와 학생 참여를 요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