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은 과격보다 ‘온정’으로
투쟁은 과격보다 ‘온정’으로
  • 박혜진 기자
  • 승인 2006.05.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힘들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최선’이란 말 앞에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1989년 본교 21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한 이귀혜(신방·93년졸)씨를 만나 당시 학생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권퇴진·통일 운동으로 인해 학생대표 상당수가 수배대상이던 80년대 후반, 총학생회장이었던 그 역시 자유로운 몸일 수 없었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이다보니 ‘혜성같이 나타났다 바람같이 사라지기’ 일쑤.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좁아 주된 활동도 ‘지하’에서 이뤄졌다. 그가 들려줄 17년전 이화, 호기심이 요동친다.

당시 총학생회장의 활동범위는 ‘전국적’이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국여학생대표자협의회 모임 등 전국 단위의 학외 활동이 많았기 때문. 거기서 결정된 사항을 학내에 전달, 학생들의 의견을 모으는 것이 그가 했던 일이다.

당시의 화두는 ‘세계청년학생축전’. 세계평화라는 이념 아래 세계 60여개국 청년대표가 모여 정칟문화예술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는 자리에 ‘우리도 참가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당시의 삼엄한 국가보안법으로 한국 학생의 참여는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수배자도 아니고, 여권도 가지고 있는 등 여러모로 조건이 맞았던 임수경씨가 대표로 가게 된 것이다. 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이귀혜 학생회장은 수배 명단에 올랐고, 1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사회 운동에 주력했지만 학내 문제에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총학생회의 대표적인 학내 활동은 ‘제 2캠퍼스 반대’와 안경점, 매점 등에 대한 ‘직영권’ 요구. 결론부터 말하자면 총학생회(총학)의 승리였다.

학교로부터 직영권을 얻어냈고, 제 2캠퍼스 건설 또한 ‘하지않겠다’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복지시설이 열악했던 그 시절,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매점 등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이는 학생들의 큰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총학은 학생들에게‘운영권을 얻어내 직접 운영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쉬울 리 없없다. 총장과의 면담은 다가오는데 좋은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집기를 부수거나 폭력을 동원하는 과격한 방법도 쓴다지만 그런 방법은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진심어린 호소였다.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사퇴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총학생회가 해야하는 일인 만큼 다른 총학이 나온다 해도 지금 보다 나아질 리는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눈물이 정의숙 총장의 마음을 움직인걸까. “귀혜야, 네가 우니까 선생님 가슴이 아프구나” 전격타결된 것이다. 총장은 학생들이 원하는대로 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이 일을 이화이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이화여대는 온정을 벗어나 과격으로 맞서면 결코 해결을 볼 수 없는 곳이에요” 누군가는 자존심을 버리고 희생할 수도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투쟁이 활발했던 당시에 비해 현재 총학은 학생 복지, 등록금 등 학내 문제를 주로 다뤘다. 그는 이를 “필연적이고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우리가 그토록 투쟁한 것”이라 말하는 그는 “그러나 과거 투쟁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내용과 방법의 부조화” 라고 덧붙인다. 내용은 바뀌었는데 방법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학생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총학의 영원한 숙제일까. 그 때에는 이귀혜 학생회장이 구치소에 수감되자, 학생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단체로 편지를 보낼 정도로 총학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치 투쟁만 했다면 당연히 외면 받았겠지만 학내 사안들에도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기에 참여를 유도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총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고 권유한다. 축제·학내 시위·자보 등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 번 쯤 들여다 보라는 것이다. 20년 남짓 살면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간접경험을 한 것이 고작일텐데, ‘총학은 어떻다더라’하는 식의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 다니는 내내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다는 그는 졸업 후 소원을 풀었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지금, 그에게 과거 학생운동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총학생회장이라는 이름 때문에 꽃분홍색을 좋아하면서도 남색·검은색 옷만 입고 다녔다는 불만, 학과 행사를 제외하면 디스코장이나 미팅 한번 제대로 못해봤다는 장난 섞인 토로만이 그가 치열한 시대의 총학생회장이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