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120주년 특집 신인령 총장 인터뷰

31일(수)은 본교가 설립된 지 12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가 어느덧 재학생 2만2천여명과 동문 16만명을 배출한 사학으로 성장했다. 신인령 총장이 이화에 머무른 지도 30년째. 25일(목) 신인령 총장을 만나 이화 120주년의 의의와 그가 본 30년간의 이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창립 120주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성에게 암흑기나 다름없었던 1886년에 이화가 이 땅에 뿌리 내린 것은 하나의 사건이자 기적이다. 당시는 아무리 부유한 집안이라도 여성을 교육시키는 일은 흔치 않았다. 이때 이화를 창립한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는 고아,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아마 하느님께서 한국 여성의 구원을 위해 ‘이화’라는 기적과 축복의 씨를 내려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화의 역사는 고난과 개척의 역사이자 한국 개화사라고 할 수 있다. ‘고난 없이 영광 없다’는 말이 있다. 120주년이 감동스러운 것은 하느님이 주신 씨를 잘 보듬어 오늘의 우람찬 거목으로 키워냈다는 기쁨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이웃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에 보답해야 할 때다.

-120년 동안 이화가 사회에서 담당한 역할은 무엇인가
이화는 시대적 조건에 맞춰 항상 도전과 개척을 계속해 왔다. 이화가 한국 사회에서 담당한 역할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사회적 편견을 뒤엎고 진취적인 16만 여성을 키워냈으며, 둘째는 국내외로 많은 여성 리더를 배출한 것이다. 세 번째는 여성 금기 분야라 여겨지던 사회 각 분야에 이화 출신이 활발히 진출했다는 점이다.
이화는 ‘최초’의 기록을 가진 여성 인재를 많이 키웠다. 이들의 사회 진출은 전체 여성의 희망이 됐다. 요즘 여러 매스컴에서 이화를 두고 ‘한국사회 ‘배꽃’만개 했네’ 등의 기사를 싣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자성하며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는 것이다.

-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난 법정대학 학생이었다. 내가 학생이던 60년대는 가난했지만 따뜻하고 진지하며 행복했던 시대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나는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했다. 그러다 이태영 교수님 덕분에 3학년 때 생활비와 학비를 모두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1964년 6월엔 한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학생 운동에 참가했다가 1년간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다른 대학 학생들 100여명은 제적까지 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 학교의 경우 선생님들이 우리를 위해 정부와 교섭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신 덕택에 제적은 면할 수 있었다.
특히 총장이던 김옥길 선생님은 ‘전국지명수배’돼 있었던 나를 도피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선생님이 쫓기는 나를 총장 사택에서 하룻밤 재워주신 적이 있다. 내가 총장이 된 후 총장 사택에 들어갔더니, 당시 내가 잤던 방의 가구들이 그대로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장학금을 받게 해 주시는 등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셨던 이태영 교수님은 지금도 찾아뵙곤 한다. 선생님께서는 농담 삼아 “너를 법조인으로 키우려고 했는데 하느님께서는 다른 일을 시키려고 하셨던 모양”이라 말씀하시곤 한다.

- 요즘 학생들은 옛날과 어떤 점이 다른가
지금 학생들은 취업 문제에만 매몰돼 있는 것 같다. 일자리 자체는 60년대보다 나아졌지만 학생들은 좀 더 좋은 직장, 좋은 조건의 일만 하려고 한다. ‘일’ 자체의 소중함과 신성함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화인이 빠지면 유지되기 힘든 많은 무명의 NGO들이 있다. 이화 출신의 인권운동가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다. 고급 일자리보다 삶의 현장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이화인이 할 수 있는 소중한 역할이 많다.
공무원을 예로 들더라도 고급 공무원보다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도전하는 이화인이 많았으면 좋겠다. 중요 사항은 대부분 ‘위’가 아닌 ‘아래에서 이뤄진다. 대통령이 누구든 아래에서 튼튼하게 받쳐줘야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자기 스스로 돈을 벌지 않으면 주체성과 자주성을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낮은 곳에서 스스로 벌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정신이 필요하다.

- 구조개혁은 어디까지 진행됐나, 또 반대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변화를 도모하다 보면 어디서나 반대 의견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저항이나 반대가 없다면 그것은 현상 유지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구성원이 반대한다면 개혁의 속도나 방향을 바꿀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현재 언론에서도 우리의 구조개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타대에서는 우리를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처음 총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의대의 의학전문대학원 전환이 결정된 직후였다. 의대 교수들은 총장이 바뀐 시기에 변화를 막아보려고 전원이 서명해 의학전문대학원 전환을 유보 또는 중지하자고 제안했다. 우수 신입생을 몇 년 간 받지 못한다는 것, 타대는 아직 시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고심하며 교육부 등 여기저기에 알아본 결과 전문대학원 전환은 시기가 앞선 것일 뿐 옳은 선택임을 확신했다. 나는 교수들에게 당장 잃는 것이 있어도 길게 보면 득이 된다고 설득했고,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의 구조개혁은 구성원을 배제하거나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경쟁력 있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미래지향적 고등교육 체계로 나아가기 위함이며, 세계 주요대학의 방향과도 일치한다. 3월 이후 실무팀을 구성해 각 전공 설립 준비 위원회를 꾸린 상태다. 전문화를 위해 전공 학점도 늘리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 이화가 앞으로 담당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120주년을 맞아 새로 제작한 슬로건 ‘프론티어 이화’는 이화의 과거 뿐 아니라 앞으로의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화는 시대 변화에 맞춰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개척자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제 한국에서 이화여대의 존재 가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대가 없던 유럽에서 여성 문제를 고민한 결과, 이화의 전략이 옳다며 우리를 본따 여대를 신설하기도 했다. 인류학자들은 수많은 과제 중 마지막까지 해결 과제로 남는 것은 아마 ‘여성 문제’일 것이라 말한다. 이화는 여성에 관한 교육 뿐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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