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도 이화의 빛은 밝게 빛납니다. 세계 각국에서 이화인의 긍지를 갖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선배님들. 현재 결성되어 있는 해외동창지회는 무려 50개에 이릅니다. 미국, 일본은 물론 독일, 아르헨티나, 인도까지 총 15개국에 분포되어있죠. 특히 미국은 25개의 지회로 나눠져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큽니다. 이대학보사는 이화 창립 120주년을 맞아 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선배님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세계인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이화를 알리는 자랑스런 선배님들을 만나보시죠.

▷“프랑스인도 제 글 읽고 와인 골라요”
프랑스 사람보다도 와인을 더 잘 아는 한국인이 있다. 바로 불문과 이재미(79년졸)씨.
파리에서 ‘프랑스 와인 프레스 협회’ 이사회의 임원으로 활동 중인 이재미씨는 와인강좌와 중개업도 병행하고 있다. 또 이씨는 국내 잡지 ‘Cookand’· ‘Best Restaurant’ 등에 와인과 레스토랑에 대한 칼럼을 기고해 왔고, 와인전문지 ‘와이니즈’와 와인전문 사이트 ‘WINE 21’에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지금은 현지인에게도 유명한 와인 전문가지만 그가 처음 프랑스에 온 목적은 와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화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불문학과 언론학 학위를 취득해 잡지사 파리 통신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97년 참여한 파리 소믈리에 협회 와인시음 수업은 그의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됐다.

그는 “와인에는 문화와 역사가 깃들어 있다”며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는 싸움이 없다고 했다. 또 종류가 다양해 늘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와인의 매력이라고. 이제 그는 1년에 몇 천병을 맛보고도 일일히 그 맛을 기억하는 베테랑이다.

이씨는 지금도 파리에 처음 왔을 때를 기억한다. 주말엔 학생식당을 열지 않아 이화 동창들이 함께 모여 밥을 해 먹었단다. 동문들이 프랑스로 유학을 왔기 때문에 그는 외로움을 겪지 않았다. 끝으로 그는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보고 즐기라”며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권했다.

▷프랑스에 한국소설을 알리다
프랑스 파리 북동부에 위치한 뷔트 쇼몽(Buttes-Chaumont) 공원. 파리지앵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 공원 근처에는 이병주(불문·62년졸)씨가 산다. 햄과 치즈를 즐겨먹는 그이지만 이씨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먼 유럽 대륙에서도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 7대학의 한국학과 명예 교수다. 30년 이상 동안 수많은 프랑스 학생들에게 ‘한국’을 가르쳤다. 한국문학·고대사·현대사 등 다루는 강의도 다양했다. “교재를 만들기 위해 ‘사미인곡’ 등 여러 작품을 불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열정 덕분일까.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동양학을 공부하며 받은 감동을 편지에 써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씨는 아직 프랑스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게 안타깝다고.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한국문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주력한다. 그가 불역해서 1992년에 출판된 소설가 오정희의 작품들은 큰 관심을 끌었다. 올해에는 16세기 조선시대의 시조와 가사를 번역해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불어와 한국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그에게 통역 등의 여러 요청은 끊일 새가 없다. 그는 또 프랑스와 한국 간 문화 교류를 위해 1999년 제정된 ‘한불문화상’의 심사위원도 맡고 있다. 양국 사이의 문화적 다리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은 그를 지탱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

▷“필리핀 아이들 고민 상담은 제 몫이죠”
동남아시아의 심장이라 불리는 필리핀. 이곳에도 이화인은 있었다. ‘마닐라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Manila)’의 ‘학교 상담사(school counselor)’로 일하는 이숙영(영문·78년졸)씨다.
‘마닐라 국제학교’는 초·중·고교가 함께 있는 국제#학교로, 전체 1700 여명 중 한국 학생이 300 여명이나 된다. 이숙영씨는 공부, 진로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그는 유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소통이 힘든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영어에 서툰 그들을 대신해 ‘입’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상담 후 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다. 한 번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껄끄러운 친구 관계 때문에 이씨를 찾아왔다. 그와 함께 집단 상담을 한 후, 아이들은 다시 좋은 관계를 회복하기도 했단다.

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안주하지 말고, 스스로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NHK 방송국의 ‘한국인’ 아나운서
한국 사람이 한국말 ‘잘’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일본말로 일본의 소식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하는 한국 출신의 아나운서가 있다. 아나운서의 꿈을 모국이 아닌 타국에서 실현한 NHK 국제 방송국 아나운서 장은영(시청각교육·76년졸)씨다.

1980년대 초 일본으로 간 그는 현재 NHK 국제 방송국의 뉴스와 ‘라디오 일본 포커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일본 방송국을 종횡무진한다. 도쿄대 교수이기도 한 장씨는 번역가로도 이름을 날린다. 2004년 4월 일본에 한류열풍을 몰고 온 ‘겨울연갗가 그의 대표 작품. 이후 ‘아름다운 날들’·‘올인’·‘대장금’ 등 NHK에 방영된 여러 드라마의 번역 역시 장씨의 몫이었다. 일본 열도를 뒤흔든 인기작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그의 작품은 이전에 일본인들이 번역한 한국 드라마와 달리,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미묘한 특성을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그의 실력 덕에 올해는 MBC 애니메이션 ‘장금이의 꿈’의 번역까지 도맡아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장은영씨는 일본인들이 이화여대를 ‘명문 이화대학’이라 부를 정도로 본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는 “오랜 전통과 선배들의 노력으로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며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이화인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네팔에서 이화의 봉사 정신 실천합니다
“자이마시!”
‘예수 안에서 승리’라는 뜻을 지닌 네팔의 인사말이다. 매일 아침 순박한 웃음을 머금은 네팔 사람들은 신경희(특교·84년졸)씨에게 이 인사를 건넨다. 그는 매일매일 내전이 끊이지 않는 네팔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외과 의사인 남편 양승봉씨와 네팔에서 선교 활동을 한 지도 벌써 11년째. 신경희씨는 기독교를 모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남편의 의료 봉사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2000년까지 탄센 병원에서, 작년까지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파탄 병원에서 사랑을 전했다. 올해는 안식년이라 오랜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신경희씨는 파탄 병원을 방문해 소아과 병동의 아이들을 위로한다. 장난감을 소독하고, 풍선을 불어주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도 한다. 환자들이 어찌나 많은지 소아과 병동만 돌보는 데도 일손이 모자랄 정도라고.

“어른이고 아이고 화상 환자들이 참 많아요. 네팔의 부엌에선 등산갈 때 사용하는 버너같은 것을 이용해 요리를 하죠. 깜박하고 엎지르면 온몸이 데고 맙니다” 또 네팔 사람들은 먹을 음식을 구하기 위해 직접 나무에 올라가 과일을 따먹기 때문에 골절 환자도 많다. 실수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엔 영락없이 병원신세를 져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로 병원에 찾아 온 환자 중엔 8개월 된 임산부도 있었다. 물론 아기는 죽고 말았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가난이 주는 비극입니다” 신경희씨는 그녀가 떠올랐는지 나지막이 읊조렸다.

신경희씨의 종교에 대한, 인간에 대한, 네팔에 대한 사랑은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정도다. 하루는 신경희씨가 자살을 시도하려던 택시 기사를 만났다. 신씨는 그를 설득하고 또 설득하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전해주었다. 우연인지 행운인지 약 한 달 후 막내아들이 타고 온 택시 안에는 그가 있었다. 택시기사는 신경희씨의 조언과 설교를 듣고 삶을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눈물이 났죠. 그것은 생명을 얻은 기쁨이었어요”

네팔은 1인당 국민 소득이 250달러 밖에 안 되는 최빈국 중 하나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전체 국민의 약 40%이고, 수도가 연결되어 있는 집은 10% 정도 뿐이다.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부귀를 다 버리고 그런 네팔로 훌쩍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집에서도 난리가 났다. 내 아들을 사지로 끌고 가려한다며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많이 원망했다.

결국 5년간의 고민 끝에 신경희씨 부부는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러나 신경희씨는 결코 자신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었던 삶이었죠. 이런 행복을 주신 하느님께 사랑과 은혜를 갚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꽃을 피우겠습니다”

▷클린턴 대통령도 인정한 꽃 디자이너
태평양 건너 미국, 커리어 우먼들이 활보하는 뉴욕에서 꽃을 통해 한국을 알리는 이화인이 있다. 이원영(생활미술·68년 졸, 미국명 클레어 강)씨는 뉴욕식물원(보타니카 가든)에서 17년간 화훼 디자인(floral design)을 가르치고 있는 미화훼디자이너협회(AIFD)의 멤버다. 그의 헤어스타일은 그곳이 패션의 도시 뉴욕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60대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눈길을 끈다.

이원영씨는 꽃을 이용한 예술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이 금방 시들어버리지 않도록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콜라주(화면에 종이·철사 등 여러 가지를 붙이는 근대 미술 기법)로 꽃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 이는 그가 미국에서 최초로 시도한 방법으로, 매년 전시회를 열고 이와 관련한 책도 준비하고 있다. 덕분에 미국·영국 등에서 이뤄지는 많은 플라워 쇼에 초대돼 독창적인 작품을 발표, 관람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클린턴 전 대통령 자택의 꽃 장식을 전담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티파니 보석상·노스트럼 백화점의 꽃 장식을 하고, 홀 푸드 마켓에서 꽃 파트의 매니저 관리를 맡아 그의 실력을 뽐냈다.

화훼디자이너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68년 이화여대 졸업 후 바로 미국으로 가 펜실베니아주립대학(Pennsylvania State University)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이후 펜실베니아아카데미오브파인아트(Pensylvania academy of fine art)에서 4년간 유화를, 카네기멜론대학(Carnegie-mellon University)에서 도자기를 공부했던 그는 지인의 소개로 처음 꽃의 길을 걷게됐다고.
처음에는 꽃꽂이만 했지만, 91년부터 뉴욕식물원에서 강의도 시작했다. 지난해엔 식물원에 있는 200여명의 강사들 중 최우수 강사에게 주어지는 ‘올해의 강사상’을 받았다. 재학생들의 평가로 결정되는 이 상을 받은 것은 언제나 학생들에게 귀 기울이며 강의하는 세심함 덕분이다. 혹여나 수업시간에 강의를 소화하지 못한 학생이 있으면 수업이 끝난 후에 개인교습을 해주는 등 꼼꼼하게 학생들을 챙긴다. 꽃꽂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꽃을 인생과 삶에 비유하며 열성적으로 강의하기 때문에 매해 200여명에 다다르는 학생 중 일부는 또다시 청강을 할 정도다. 이원영씨의 제자들은 미국,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는 한국 홍보대사 노릇도 하는 셈이다.

그는 “자연 그대로의 꽃을 이용해 꽃꽂이를 해야지 인위적으로 힘을 가하면 줄기가 부러져 버리고 만다”며 꽃꽂이든 인생이든 남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비우고 ‘꽃 같은 마음으로’ 아름답게 임해야 한단다.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하지만 꽃은 방방곡곡을 여행하니 나도 함께 여행하는 셈”이라고 말하는 그. 언젠가 모교에서 후배들에게 자신의 화훼디자인과 꽃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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