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보사 최대 고비라고 하는 정기자 시절.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어렵다고 하는 취재원 컨택도 전화 한 번이면 성공이었다. 취재가 부족해서 기사가 깨졌다느니, 취재원이 시간 약속을 안 지켜서 고생했다느니 하는 일들은 다 남 얘긴가 싶었다.

‘정기자 별 거 아니구만’하는 자만심 잔뜩 섞인 생각을 할 때 즈음, 나에게 기사꺼리 하나가 주어졌다. 이화 출신 문인들의 계보를 작성하라! 이는 개교 120주년을 맞이해 학보사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특별 기획이었다. 120년 동안 문학, 영화, 패션, 정치계에서 이화를 빛낸 동창들을 소개하는 고정란의 첫 타자가 된 것이다. 120년이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인가. 게다가 첫 번째다. 두 번째라면 다른 기자의 기사 형식을 참고라도 할텐데, 전례도 없었다. 그야말로 블루오션이다. 기사를 잘 뽑아낸다면 말이다. 앞이 깜깜해졌지만 이번 기사 역시 술술 잘 풀릴 것이라는 마음으로 취재를 시작했다.

나름대로 인터넷 조사를 했더니 최근 작가들의 자료만 나오기에 이화동창문인회 회장님에게 도움을 구했다. 원로 문인들의 자료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문과 교수님들께도 메일을 돌렸다. 한 분은 감감무소식이고 두 분께서 메일에 답변을 주셨다. 작가들을 추천해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조사를 거듭할수록 작가 명단은 많아지고, 나의 판단력은 흐려졌다. 100명 가까운 사람들의 인명 속에서 나는 방향감각을 잃었다.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야속하게 시간은 흘러갔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부족한 점이 드러났다. 떠오르는 신진 작가들의 자료는 아예 없었고, 시대 별 비율도 맞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마감일을 지키지 못했다.

수습기자 때, 선배 언니에게 ‘마감을 지키지 못한 기사는 쓰레기’라는 말을 들었었다. 이 말이 내 머릿속에서 맴맴 돌았다. 쓰레기. 지금은 학보사를 떠난 그 언니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10명이 넘는 취재원을 만났으니 그 사람들이 모두 기사를 보고 싶어 할 것 아닌가. 여러 사람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만 점점 심해졌다. 

결국 그 다음 주로 기사는 밀렸고, 나는 국문과 김미현 교수님께 전화해서 나이에 맞지 않게 떼를 쓰기에 이르렀다. 선생님은 호탕하게 웃으시며 화요일에 연구실로 찾아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됐다!’며 쾌재를 불렀다. ‘선생님이 다 알려주시겠지’라는 마음으로 연구실로 찾아간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교수님은 내가 뽑은 문인 명단을 보시며 “기사의 방향이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120주년을 맞이해서 이화 문인을 소개하는 기사라고 답했다. 그 때부터 교수님의 질타가 시작됐다.

“아무 준비도 안하고 왔구만. 일주일동안 뭐했어? 한 주 미룬 거라며. 기사를 쓰려면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지.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게 뭐니? 이화에 그동안 이러저러한 문인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건 ‘현재’ 아니겠어? 기사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속사포처럼 쏟아내시는 말들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 후로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들은 그야말로 ‘그대로 옮기면 다 기사’가 될 만큼 주옥같은 말들이었다. 나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고 들은 말들을 고이고이 새기고 돌아 섰다.

교수님을 만나고 온 후로 자신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초심은 어디로 가고 아무 생각 없이 기사를 쓰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좋은 기자는 1, 2단으로 쓰일 단신도 부풀려서(물론 깊은 취재를 통해 정당하게 부풀리는 거다) 탑 기사로 만든다는데, 난 열정 없는 딱딱한 기사만 써내고 있었구나. 괜히 학보사 망신만 시킨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나 때문에 전체가 욕먹는 것, 이게 정말 비애다. 

어찌어찌해서 문인 기사는 마무리됐고 이 기사가 신문에 실린 것이 2주 전이다. 그런데 왜 내가 이번 주 못다한 이야기에 2주 전 기사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하면, 이야기는 또 어젯밤(5월 18일 목요일)으로 되돌아간다. 이번 주 마감하는 기사가 너무 안 풀리기에 이화이언 게시판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재밌는 저장 글에 웃기도 하고 소소한 고민 글에 동감도 하면서. 그 때, 제목에 학보가 들어간 글이 있기에 얼른 클릭해봤다. 조회 수는 무려 280. 세상에나! 내 문인 기사 얘기였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학보 문인 기사에서 노천명, 모윤숙 시인을 민족 저항 시인으로 둔갑시켜 놨더라. 그들의 공도 공이지만 과도 이야기해야하지 않는가. 어떻게 친일을 한 시인을 저항시인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선배인 것도 좋지만 정확하게 평가하자.’

댓글은 더 가관이다. 이래서 월요일마다 학보가 보기 싫다니! 아, 나는 또 학보사를 욕 먹이고 만 것이다. 이를 본 순간 울고만 싶어졌다.

그렇다. 이것도 내 잘못이었다. 내가 기사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귀가하는 바람에 기사 분량을 줄이는 과정에서 모윤숙, 노천명의 ‘공’만 들어가고 ‘과’ 부분이 싹 사라진 것이었다. 기사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했다.

여러모로 120주년 특집 문인 기사는 나에게 많은 교훈을 줬다. 매너리즘에 빠지려하던 나를 제자리로 돌려준 고마운 기획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꺼져가던 열정을 불사른 나는 오늘도 학보사에서 마감 중이다. 

이 글을 빌어 학보사 전체 성원들에게 본의 아니게 누를 끼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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