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만이 오롯이 빛을 발하는 어두운 교정.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조형예술관 A·B·C동의 창문에서는 여전히 불빛과 음악소리, 그리고 웃음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조형대의 연례행사인 ‘학생작품전시회’가 22일(월)∼27일(토)까지 조형대 건물에서 열립니다. ‘메이데이전’이라 불리는 이 전시는 모든 과에서 준비하는 아주 큰 행사인데요. 각 과 학생들은 1∼2주일씩 밤을 새며 온 열정을 쏟는다고 하네요. ‘야간작업’의 줄임말인 ‘야작’은 그들만의 일상용어입니다. 잠도 못자고 작업을 하니 다음날은 꾸벅꾸벅 졸기 일쑤. 그래도 그들은“힘들어도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 재밌어요”라고 말합니다.

18일(목)에서 19일(금)로 넘어가는 밤에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 조형대를 찾아갔습니다. 섬예과·패션디자인과·조소과·회화판화과 학생들의 ‘야작’ 이야기, 여러분도 들어보시겠어요?

▷ 바늘이 부러져도 끄떡없는, 패션디자인과
팝가수 EVE의 ‘Let's get retarded’가 흘러나오는 이곳은 조형대 C동 3층 패션디자인 전공실. 마네킹들과 실패, 천조각이 즐비한 가운데 패션디자인과 학생들이 분주히 손을 놀리고 있다.

이들이 디자인하는 옷의 컨셉은 ‘아방가르드’. 전시를 약 일주일 남겨둔 시점에 전시 주제와 옷 소재가 갑자기 바뀌어서 비상이 걸렸다. 새롭게 작품을 구상하느라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나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마음도 조급하다.

천을 자르고 마네킹에 옷을 입히며 재봉틀을 돌리는 등 제각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유지혜(패디·3)씨가 “악!”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재봉틀의 바늘이 부러져 날아간 것이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괜찮으냐며 달려왔지만, 유씨는 담담하게 쪽가위를 요리조리 돌려 바늘을 갈아 끼우고 이내 다시 재봉틀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표정이 신중하다. 까만 스타킹을 갈가리 찢어 스카프 형태로 만드는 김남영(패디·3)씨의 코끝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옷 입는 ‘센스’ 하나는 최고라 자부하는 패디과 학생들도 ‘야작’하는 날은 예외가 된다. 신수연(패디·3)씨는 본격적인 옷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까만 트레이닝 바지에 후드티와 슬리퍼. 신씨만의 ‘야작’ 전용 작업복이다.

눈 붙일 틈도 없이 밤을 지새워야 하니 커피 서너 잔은 필수다. 커피로도 이기기 힘든 피곤을 물리칠 수 있는 건 함께 하는 친구들 덕분이다. “이 부분을 이렇게 마는 건 어때?” “옆으로 좀 더 퍼트려봐. 그래, 그게 낫다” 서로 조언을 주고받는 등 수다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바늘을 쥔 채로 웃다가 손가락을 살짝 찔리기도 한다.

경비 아저씨가 문을 잠그기 직전, 분식집 ‘김가네’ 아저씨가 헐레벌떡 도착했다. 2천 원씩 걷어서 주문한 김가네 김밥이 책상 위에 줄줄 쌓인다. 천 자르고 실 박느라 여념이 없던 학생들이 잠시 손을 놓았다. 마네킹에 둘러싸인 채 친구들과 같이 먹는 야식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 돌 끝에서 불꽃튀는, 조소과
캄캄한 조형대 밖 공터가 돌 끝에서 퍼져나온 불꽃 하나로 밝아진다. 새벽 내내 부연 연기 속에서 정신없이 조각하다 보면, 새벽 공기의 차가움도 잊고 작품에 빠져든다.

마스크에 목장갑에 방한복까지 입어줘야 작업 준비가 완료된다. 단단히 차려입은 이지은(조소·3)씨는 커다란 모기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에어툴(air tool)을 돌린다. 이제 모기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가끔 작업을 하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고양이들 때문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작품의 형태가 점점 또렷해질 때마다 지은씨의 몸은 흰 가루로 뒤덮인다. 에어툴에 의해 깎여 나간 돌가루가 풀풀 날린다.

조소과 학생들은 나무·돌·금속 등 크고 무거운 재료들을 주로 사용한다. 큰 돌덩이를 여학생 셋이서 옮기는 게 영 불안하다. “공학이면 남자들이 다 하는데”라며 이지수(조소·3)씨가 투덜대고 있던 중, 정혜연(조소·3)씨의 남자친구가 작업을 도와주러 왔다. 다들 간만에 “장정이 왔다”며 철판 자르기·용접·돌 옮기기 등 이것저것 잡일을 시키느라 신이 났다.

건물 안에서는 소조(점토를 사용해 형태를 빚는 것) 작업이 한창이다. 복도에서부터 시너(신나) 향이 코를 찌른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포질 하느라 끙끙대는 김민경(조소·3)씨. 오랜 시간 계속되는 작업에 다리가 저릴 만도 한데 30분이 넘도록 일어나지를 않는다. 시너·폴리코트 등 독한 약품을 쓰다 보니, 그의 팔에는 울긋불긋한 상처도 남았다. 최지은(조소·3)씨는 실제 크기와 똑같은 인체 작품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그 역시 컬러링 작업에 필요한 시너를 계속 뿌리다가 “으, 취했어”라며 눈을 깜박인다.

한 쪽 구석에서 슬그머니 의자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밤12시가 넘어가면서 졸기 시작하는 학생들이 생긴 것이다. 작업용 의자 4개에 의지하는 새우잠이지만 금세 잠들어 버리고 만다. 몸과 마음이 힘들어도 작업실의 불은 꺼질 줄을 모른다.

▷한 땀마다 흘리는 땀 한 방울, 섬유예술과
학생 12명이 줄지어 앉은 모양새가 그들의 바느질 솜씨 만큼이나 정갈하다. 이들의 조심스러운 손놀림을 따라 오색 찬란한 실들이 천 위에 꿰어진다. 앞으로 5일 안에 작품을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있지만, 쉴새없이 돌아가는 바늘은 성공을 예감케 한다.

섬예과 학생들은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아 작품을 만든다. 특히 메이데이를 맞아 ‘꽃’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대다수다. 이가혜(섬예·3)씨는 영화 ‘쉰들러리스트(Schindler's List)’에서 영감을 얻어, 꽃의 이미지를 통해 전쟁을 표현할 생각이다. 붉은 톤의 꽃과 실탄이 얼키설키 얽힌 스케치 도안을 자수 책상에 올려놓았다. 도안과 천 위의 자수를 비교하느라 계속 도리도리 고개짓이다.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땐 자수를 놓다말고 한참을 고민한다.

작업이 막바지인만큼 오늘은 차영순 교수도 함께 밤을 새기로 했다. 차 교수는 학생들의 작은 실수도 귀신같이 잡아내곤 한다. 가혜씨는 잘못 놓은 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곧 마음을 추스리고는 천이 상하지 않게 뜯어내느라 온몸 바짝 힘이 들어간다. 꼼꼼하신 교수님이 보게 되면 틀린 부분은 처음부터 다시 수를 놓아야 한다.

“빨간실 남은거 있어?”, “실 좀 꿔줘” 실이 모자란 몇몇 학생들이 책상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닌다. 하지만 딱 들어맞는 실을 찾기가 쉽지 않아 울상이다. 각자 자신의 작품에 어울리는 천과 실을 직접 결정해 따로 구입했기 때문이다.

이새미(섬예·3)씨는 실제 꽃과 같은 사실적인 작품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벌써 집에 보름째 못 들어가고 있다. 간단한 세수는 학교 세면대에서 하고, 샤워도 학교 수영장과 체대 샤워실에서 해결한다.

“작품 끝나기 전까진 남자친구도 학교에서만 만나” 완벽주의 차영순 교수의 엄명이 떨어졌다. 놓아도 놓아도 끝이 없는 자수의 길. 오늘도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밤을 하얗게 수놓는다.

▷캔버스 위에서 춤추는 붓, 회화판화과
A동 6층은 적막하다. 복도 한가운데는 페인트칠을 하다 만 나무집 모형이 서 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통로에 덩그러니 놓인 사물함은 공포영화 속 학교를 연상시킨다. 그 순간 구석에 있는 한 실기실에서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마무리 작업을 위해 학교에 남은 회화판화과 학생들이다.

백혜림(회판·2)씨의 캔버스에는 음식을 떠먹고 있는 자신의 초상화가 유화로 그려져 있다. 캔버스 속의 혜림씨는 긴 생머리에 곱게 화장을 했는데, 붓을 들고 있는 혜림씨는 머리를 질끈 묶고 도수 높은 안경을 썼다.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까만 앞치마를 두르고 맨발에 슬리퍼도 신었다. 그는 옆에 붙여놓은 사진과 캔버스 속 그림을 연신 번갈아 본다.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음영을 주기 위해 물감을 짜고 또 짠다.

복도에 있는 나무집의 주인은 서리(회판·2)씨. 하얀 페인트를 여러 번 펴 바르는 중이었다. 바닥을 더럽히면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혼난다며 신문지를 깔았지만, 정작 입고 있는 청바지는 페인트 얼룩 천지다. 일부러 그린 무늬 같기도 하다. 새 옷을 사도 그 중 절반은 영락없이 이런 작업복으로 전락하고 만다.

집에 있다가 밤10시쯤 학교에 온 박은선(회판·2)씨는 “여기 너무 편해”라며 키득거렸다. 건물의 문이 다시 열리는 새벽5시경까지, 이곳은 오직 그들만의 아늑한 작업 공간이다.
수다를 떨며 한창 손을 놀리다보니 어느새 눈이 끔벅끔벅 감긴다. 혜림씨는 작품보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벽에 세워져 있던 기다란 스티로폼 판을 바닥에 깔았다. 선반 사이에서 미리 갖다놓은 이불을 쓱 꺼냈다. 스티로폼을 침대 삼아 눕고 이불을 덮자, 작품보관실은 곧 훌륭한 수면실이 된다.

화장실에서는 물소리가 들렸다. 역시 학교에서 밤을 새고 있는 학생 세 명이 세수를 막 마친 상태. 예전엔 찬물밖에 안 나와서 세수하기 힘들었는데, 이젠 뜨거운 물이 나와 훨씬 편해졌다. “샤워실까지 있으면 참 좋겠어!” 이민지(한국화·3)씨가 외쳤다. 못 감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들은 다시 ‘야작’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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