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북자도 낯설어 하던 김민지(중문·3)씨. 그랬던 그가 지금은 탈북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일에 푹 빠졌다.

2005년 겨울, 본교 ‘한국문화표현단’ 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답사하러 갔던 경주에서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셋넷학교를 만났다. 우연히 그가 속한 동아리 담당 교수와 셋넷학교 교장이 친분이 있었기 때문. 자원활동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북한이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는 교장선생님과 몇 번 이야기를 나누다 덜컥 자원교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회상한다.

지난해 3월, 역사 과목을 맡은 김민지씨. 첫 수업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내용을 이해하기는 커녕 단어 자체의 의미를 몰라 매 수업 곤혹스러웠다고. 영어를 가르쳤던 지난 2학기 역시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한마디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북한은 영어를 안 배우잖아요. A,B,C,D부터 가르쳤으니까요”라며 웃는다.

그렇지만 새터민(북한 이탈 주민) 학생을 가르치면서 배운 것도 많다고 덧붙였다. 수업시간 3·1운동, 독립운동 등에 대해 가르치는데 대뜸 새터민 학생이 반론을 제기했다. 한반도의 독립운동가는 김구, 안중근 뿐 아니라 북한의 김일성도 있다는 것. 그는 “북한에도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생각자체가 새로웠어요”라며 남한의 체제와 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할 때는 감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대할 때 조심스럽진 않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는 “애들은 다 똑같은 애들이더라고요”라며 어떻게 하면 수업시간을 빼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공부하기 싫어 몸부림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평범한 중고생들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학생들이 상처 받을까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지금은 학생들과 수업 후 영화도 보러가고 노래방도 가는 스스럼 없는 사제지간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함께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아이들과 많이 가까워졌어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힘든 시기를 함께 해서일까. 검정고시가 가까워지자 그는 일주일에 한 번 가던 수업을 주말까지 매일 나갔다. 밤샘과외를 하고 학생들과 집으로 가던 길, 학생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첫키스 이야기부터 탈북 후 중국에서의 힘든 시간들을 털어놓는 학생들을 보며 아이들과 자신 사이에 벽이 허물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게다가 그 해 검정고시에서 학생 전원이 합격하면서 뿌듯함과 함께 사제간의 정이 더욱 돈독해졌다.

셋넷학교 자원교사를 하면서 그의 생활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수강신청 책자에 있는지도 몰랐던 북한정치론 수업을 수강하는가 하면 ‘남과 북, 그 막힘과 트임’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서 발제와 토론을 맡았다. 남북문화통합교육원 등 북한, 통일 관련 행사참여를 비롯, 원고도 2번이나 기고했다. “새터민이 이제 7천명이 넘었대요. 통일이 되면 부작용도 많을 것 같아 걱정이예요”라는 그의 모습에서 이제 낯선 ‘북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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