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정대현 교수(철학 전공)의 저서「다원주의 시대와 대안적 가치 」

연세대 박이문 특별초빙교수(철학 전공) 서평 기고

5백 쪽에 가까운 정대현 교수의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 낱말은 ‘여성’ 또는 ‘여성성’이다. 그러나 이 책은 한 학제적 개념으로서의 ‘여성학’이 아니라 ‘여성성’을 그 중심에 둔 저자 자신이 처음으로 창안하고 체계화 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이다.
‘여성학’은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구별되는 여자들의 많은 사항에 관한 모든 연구를 지칭한다. 이 학문이 성립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남자에 의해서 개인적·사회적 및 문화적으로 왜곡돼 부당하게 차별과 억압을 당해왔던 여성에 대한 올바로 인식과 해방이라는 이념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알아야한다.

'자기 목소리' 낸 철학계의 참신한 본보기
정 교수도 그러한 이념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의 경우 ‘여성’은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최고의 가치로서의 ‘여성성’을 뜻하며, 그의 책이 의도하는 것은 여성학의 정립이 아니라 기존의 어떤 철학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체계로서의 ‘여성주의’이다.  정 교수의 여성주의 철학을 담은 이 책은 몇 가지 차원에서 그 분량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첫 번째 의미는 저자의 말대로 ‘자기목소리’를 분명하고도 당당하게 내고 있다는데 있다. 지금까지의한국철학은 전통적으로 동양 철학의 경우 자신의 개성이 있는 혁신적·철학적 이론을 세우기보다는 기존의 철학적 텍스트와 사상에 주석을 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역사가 짧은 서양철학의 경우 대체로 수입된 이론들을 이해하고 소개하는데 급급해 왔던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이러한 철학을 ‘강단철학’이고 부르자. ‘강단철학’은 나름대로 철학하기에 필수적이다. 과거의 위대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많은 철학을 배울 수 있고 배운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수 할 수 있다.

그러나 참다운 철학 하기는 철학자 자신이 독립된 개인으로서 스스로 ‘자기의 목소리’로 사유 하는 활동 자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이 책은 “발상·발전·전개에 오랜 시간이 투입되어, 이론적이기보다는 고백적이고 객관적이기보다는 자전적”이다. ‘자기 목소리’로 오랜 세월에 걸쳐 심혈을 기우려 일궈 낸 심사숙고한 산물이라는 점에서의 한국철학계의 참신한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둘째, 어떤 관점에서도 철학사로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의 동서철학을 간접적으로나마 개관케 하고, 다소 난삽하지만 첨단 전문적 철학이론과 철학적 분석방법을 다소 익힐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교육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철학적 체계의 신선한 틀짜기
서양철학의 전공자이자 분석철학의 방법에 통달한 저자는 이 책에서 칸트·빗트겐슈타인·콰인가 같은 서양철학과 「주역」, 「중용」과 같은 중국의 대표적 텍스트와 유교의 공자와 맹자와 같은 사상체계를 아울러 많이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철학이라는 학문의 내용을 몰랐던 독자는 저자의 논증에 대한 동의나 거부 여부와는 상관없이 철학이라는 지적 작업이 어떤 것인가를 다소 익힐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저서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준 야심에 찬 철학적 체계의 신선함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대담하게 의도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동서 어느 곳에서도 풀 수 없었던 철학적 문제를 모두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체계의 틀 짜기이다. 그는 어느 면에서 헤겔이 「정신현상」에서, 화이트해드가 「과정과 실체」가 시도했던 것과 조금은 유사한 종류의 ‘성기성물철학(成己成物哲學)’이라 이름 지을 수 있는 철학체계를 세우려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낱말은 경우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 그림으로서의 ‘세계관’과 어떤 주장의 준거를 추구하는 ‘논리적 분석’의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정교수의 ‘성기성물철학’이 헤겔이나 화이트해드의 두 저서와 비유될 수 있는 것은 전자의 뜻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사실이다.

서양적 세계관 비판, 제 3의 철학 제시
정 교수의 새 철학의 출발점은 2천 4백 년 소크라테스·플라톤에 정초되어 서양의 근대를 거치면서 그 후로 세계전체로 확산되어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 이전까지 지배해 왔던 서양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다. 기존의 세계관의 특징은 ‘이분법적 분별’에 있고, 그것은 이원적 존재론·이성 중심적인 독선적 보편주의 인식론·자유와 평등의 가치관·인간중심적 자연관·위계적이고 권위주의 사회관·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 정치철학·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이념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같은 서양적·근대적 세계관과 문명의 일반적 특징은 동양을 지배해 왔던 사상들과 문명의 ‘여성적’이라는 일반적 특징과 비교해서 ‘남성적’이라고 불리어 왔고, 남성적 가치와 문화의 우월성이 객관적 사실로서 의심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그 허구성이 폭로됨으로써 오늘날 모든 것이 상대화 되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한 상대주의는 모더니즘 비판이라는 의미는 지니지만 모더니즘에 기반을 둔 현대의 문명과 문화가 안고 있는 문제해결의 만족스러운 패러디임과 지침은 될 수 없다. 모든 행동은 존재론적·도덕적 가치의 선택이며, 모든 가치의 선택은 적어도 어느 차원에는 현실에 대한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이며, 상대적이 아니라 보편적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성기성물은 여성주의적 개념
정 교수의 철학적 궁극적 의도는 위의 상반된 두 가지 철학적 사유의 갈등을 극복하고 그것들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제 3의 철학을 제시하는데 있으며, 그는 모형을 「주역」에서 찾을 수 있는 고대 중국사상, 특히 유교적 사상의 모체가 되는 ‘성기성물’의 개념에서 발굴할 수 있다고 확신하다.

정 교수에 의하면, ‘성기성물’이라는 개념은 그것을 ‘成己成物’이라는 한문으로 써서 “나/인간/마음/남자의 이룸은 곧 남/자연/몸/여자의 이름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모든 것들 간의 존재론적 동일성을 뜻한다. ‘誠己誠物’이라는 한문은 “나/남자/인간의 지성은 곧 너/여자/자연의 지성”이라고 도덕적 개념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이것과 저것 간의 존재론적 차별 따라서 궁극적 갈등,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와 가치의 궁극적 분류가 모두 서로의 갈등을 넘어 하나의 크나큰 우주적 조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일원론적 동양의 세계관을 표상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로 ‘성기성물’이란 철학적 명제만이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정신적·사회적·생태학적·문명사적 혼란과 위기를 극복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적 세계관이라 주장한다. 그것은 철학의 궁극적 의미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 달성에 기여에서만 찾을 수 있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데 있으며, 아름다운 사람은 약자의 편에서 남에 대한 배려와 남과의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고 고백적으로 전제한다.

그는 이러한 철학의 모태를 고대 중국의 음양사상의 형태로 우주관·인간관·가치관을 나타내는 ‘성기성물’의 개념에서 발굴했다고 고백하고 그러한 철학을 ‘여성주의적’이라고 특징 짓는다. 이 때 ‘여성주의’는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유린된 생물학적 분류적 개념으로서의 ‘여성’의 자유와 권리의 정당성이 아니다. 어머니로서의 한 인격적 존재가 그의 한 타자로서 자신이 낳은 애기에게 보편적이고 헌신적으로 ‘배려’그리고 자기의 몸 이상으로 애기에게 헌신적으로 바치는 ‘사랑’의 가치를 지칭한다.

한마디로 ‘성기성물’이라는 정 교수의 철학은 약자를 위한 철학이며 사랑의 철학이며, 이렇게 구성된 그의 철학은 일종의 인격적 우주관이며, 그 자신이 말한 대로 ‘고백적 철학’이다.

정 교수의 논변의 세부적 논지 및 그 전제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언급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저서를 읽고 난 독자는 철학자 정 교수의 사유의 깊이와 섬세함에 지적 찬사를 숨길 수 없고, 인간 정대현의 심성의 따듯함과 선함에서 받는 감동을 감출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기고자 소개
연세대 박이문 특별초빙교수(철학전공)

1955년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57년 서울대대학원 불문과 석사
1964년 소르본느대 불문과 박사
1970년 서던캘리포니아대 철학 박사
1979년 미국 시몬스대 철학과 교수
1991년 포항공대 철학과 교수
2002년 연세대 특별초빙교수

문학은 물론 과학철학·분석철학·예술철학 등 다양한 철학세계를 확립한 학자다. 저서로는 「문학과 철학」(민음사, 1995), 「아직 끝나지 않은 길」(민음사, 1995)등이 있다. 시인으로도 활동하며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민음사, 1987) 등의 시집을 펴냈다. 또한 그의 산문 <길>, <나의 길, 나의 삶> 등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면서 올바른 글쓰기의 모범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은이 소개
1977년 이후 본교에서 인식론, 언어철학, 심리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고려대학교(학사·석사·박사),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학사), 템플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심성내용의 신체성: 심리언어의 문맥적 외재주의」(아카넷, 2001), 「맞음: 진리와 의미를 위하여」(철학과현실사, 1997), 「필연성의 문맥적 이해」(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4),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개념의 일상언어적 분석」(서광사, 1990), 「한국어와 철학적 분석」(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5)를 저술하였고, 「표현인문학」(생각의나무, 2000)을 공져하였다. 최근에는 영상 언어, 문맥 개념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