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산조’ 부문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문재숙 교수(한국음악 전공)

우리 학교에 보물이 하나 늘었다. 박물관에 있는 유물이 아니다. ‘뚱기둥’ 가야금 소리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온 본교 문재숙 교수(한국음악 전공)가 ‘가야금산조’ 부문 인간문화재로 14일(화) 지정됐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보물인 셈이다.

◆과거
“믿어지지 않아서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말도 못했어요.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가 오니, 되긴 됐구나 싶었죠” 문 교수는 인간문화재 지정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의 감격적인 순간을 이처럼 담담하게 전했다.

그가 인간문화재가 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배가 부르면 족보를 찾듯, 나라 경제가 좋아지면 우리 것을 찾게 될 거다”라는 오빠(현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의 권유로 가야금과 함께 한 세월이 어언 40년. 문 교수는 이번 영광을 ‘대우승천(大愚昇天)’이라고 비유하며 조용히 웃었다. 때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리석게 한길만을 걸어온 결과라는 것.

특히 그는 독주곡 형식으로 장단 변화가 돋보이는 ‘산조’를 연주해 왔다. 그의 스승은 가야금산조의 틀을 세운 김창조의 친손녀이자,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완성한 죽파 김난초(1911­1989). 대학생 시절 명인급 공부가 하고 싶었던 문 교수는 직접 죽파를 찾아갔다. 죽파의 애제자였던 그는 결국 후계자로 뽑혔고 죽파의 가야금산조를 전수받았다. “가야금산조에는 여러 유파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죽파산조는 ‘푹 끓인 곰국맛’이라고 할 수 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저음에서 오는 깊은 맛이 씹을수록 매력적이라 다른 산조에는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단다.

◆현재
그렇게 오랜 세월을 가야금산조만 타 오는 동안 지겨운 적은 없었을까. 문 교수는 확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일평생 지루한 줄 몰랐고 지금도 설레는 마음으로 산조를 타요”라고 말했다. 그는 가야금산조를 한마디로 ‘인생’이라 표현했다. 슬픈 ‘계면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꿋꿋한 ‘우조’만 있는 것도 아닌, 삶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는 곡이라 연주할 때마다 새록새록 하다고.

그는 얼마 전 병원에서 목뼈가 왼쪽으로 15도 가량 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가야금을 켜기 위해서는 목을 살짝 왼쪽으로 돌려야하기 때문이다. 왼쪽 어깨는 항상 뻐근하다며 인터뷰 중에도 어깨에 찜질팩을 올려놓고 있다. 하지만 그런 ‘직업병’도 가야금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기엔 역부족인 듯하다. 문 교수는 도통 쉴 새가 없다. 그는 ‘김해시립가야금연주단’의 음악감독으로 선곡·음반·교육 등의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지휘한다. 또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1990년에 ‘예가회’라는 국악찬양단체를 창립했다. 예가회는 지금까지도 음반 및 공연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미래
문 교수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마냥 기쁘기보단 오히려 어깨가 무거워진다고 했다. “인간문화재는 문재숙 개인의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것이에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숙연함이 깃든다. 국악이 대중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가야금산조가 이 시대의 ‘골동품’이 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인간문화재라면 예술인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그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간단하지만 어쩌면 가장 심오한 목표, 그것은 바로 ‘연주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문 교수는 이와 관련된 추억담을 소개했다. “1979년 데뷔 독주회를 마친 후 해이해져 있던 차에 죽파 선생님이 ‘너는 계속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는데 왜 안 하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성공이 뭐냐고 물었죠. 그때 하신 말씀이 바로 ‘성공이란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였어요.”

내심 ‘성공은 교수나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그에게 이 말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그것은 제가 끊임없이 풀어야 하는 숙제로 남아있습니다”라는 문 교수의 마지막 말은 이미 기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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