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여자 의용군의 행보가 궁금하다. 독립운동가 아내들의 기구한 삶이 흥미롭다.

여성사(史)의 체계적인 확립을 위해 29일(목)∼30일(금) 인문관 111호에서 ‘한국여성의 생활세계와 의식변화’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번 대회는 광복 전후 여성들을 재조명함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밝혀낸다는 폭넓은 의의를 갖는다. 축사를 맡은 전(前) 한국여성개발원 정세화 원장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여성사의 연구들이대회를 통해 통합됐다”며 기쁨의 뜻을 전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아름다운 시절’에서 묘사된 전쟁 속의 여성은 늘 후방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다. 특히 스크린에 표현되는 남성의 고뇌와 갈등은 남성 중심의 전쟁 구도를 암묵적으로 전한다.

성균관대 이임화 교수(사학 전공)는 위 작품을 예로 들며 전쟁과 여성의 잘못된 통념에 대해 지적했다. 전투에 동원된 여자 의용군과 생활전선으로 뛰어든 여성들을 통해 전장과 후방으로 굳혀진 남녀의 잘못된 이미지를 반론한 것이다. 여자 의용군 모집이 마감 3일전에 정원을 초과한다는 기록은 이에 근거로 작용한다. 그는 모든 여성 의용군이 전투 인력으로 동원된 것은 아니지만 “구국의 잔다르크”라 비유될 만큼 당시 여자 의용군이 사기는 높았다고 전했다.

더구나 한국전쟁 중 여성들의 경제 활동은 ‘부의 창조자’·‘생산적 담당자’라 표현될 정도다. 상업 분야는 물론 공업 분야의 여성 종사자가 1949년 2만8천872명이었던 것에 반해, 전쟁이 시작된 이후 1951년에는 8만4천892명으로 늘어났다. 농업과 어업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착출된 200만명이 넘는 남성들의 빈자리를 30만명의 미망인들이 채운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여성 노동력은 사회와 가정을 지키는 뿌리로 성장하고 사회 중심부에 자리잡는다.

그럼에도 상하구조를 띤 당대의 남녀 관계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특수상황(전시)임이 강조되면서 여성의 생산활동은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여성의 권리를 논하는 것은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이라 치부되기도 했다. 이는 남녀의 상하관계를 강화시켰다. 여성은 전쟁 후 남성들에게 일자리를 양보했고, 1953년 여성의 사회 진출은 전쟁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발표를 이어간 우리 학교 함인희 교수(사회학 전공)는 전쟁 전후 혼란기 여성의 삶을 언급하며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이 치열한 삶을 살았음에도 당시 역사는 이를 외면하고 정칟경제 격변을 증언하는데 그쳤다”고 말했다.

해방 전후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에 대해 발표한 국가보훈처 윤정란씨는 그들의 일대기를 통해 근대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당시 유교적 여성관에 얽매인 여성들은 식민지 조국과 이에 희생되는 자신의 삶을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에 그들의 운명을 내맡긴 것이다.

반면 당시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남편은 아내의 주인도 아니고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남편을 부차적인 문제로 여겼다. 사회적 비난에도 동거·재혼을 주저하지 않는 부분은 그들의 깨어진 사고를 잘 보여준다. 또 독립운동 중 나타난 그들의 신념은 ‘반공법’아래 가해지는 국가 폭력을 감당케 했다.

여성의 생활세계와 의식변화는 정치 참여와 가족 제도에서도 발견된다. 여성의 정치 참여는 2000년에 도입된 ‘비례 대표직 여성 30% 할당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할당제는 여성 단체의 활동 성과인 반면 정치계를 향한 투쟁의 역사가 중단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가족제도에 대한 논의는 ‘가족이란 무엇인갗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으로 시작됐다. 함인희 교수는 “가족이란 테두리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고 최상의 삶의 요건을 이루게 한다”며 가족위기론을 논하기에 앞서 가족이 갖고 있는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가족위기론은 오늘날 한국가족의 구조변화를 두고 해체 위기에 놓여있다는 우려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재구조화되고 있는 논의가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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