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탐닉, 사랑의 광휘

: 영화 <올드보이>와 「실비아 플라스 시집」

▲ 사진제공:쇼이스트
어두운 영상과 극으로 치닫는 반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는 말이 실감나는 영화 <올드보이>는 어긋난 사랑이 불러온 죽음과 이를 인정하지 못해 꿈튼 복수를 치밀하게 묶는다. 그리고 죽음과 복수의 중심에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고통받는 한 소녀가 있다.

우진과 수아, 남매간의 사랑은 순수함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윤리적 잣대에 부딪힌다. 결국 사랑과 현실의 간극을 줄이지 못한 수아는 자살을 택하게 되고 이는 영화의 결정적 모티브로 작용한다. 문학에 일가견이 있기로 소문난 박찬욱 감독은 소녀의 자살에 예리한 소품을 등장시킨다. 소녀가 자살하기 전 운동장 벤치에서 읽고 있는 「실비아 플라스 시집」. 소녀와 실비아 플라스는 죽음의 방식 외에도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서른 살의 나이를 끝으로 비극적인 인생을 살다간 여성시인 실비아 플라스(1932­-63)는 ‘4번의 자살 시도’라는 광기어린 삶으로 유명하다. 최고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파격적인 시를 발표했던 그는 결혼이라는 전환점을 통해 다시 한번 주목받는다. 시인이었던 남편 테드 휴즈와의 격정적인 사랑이 그의 시적 영감을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비아 플라스는 이후 남편의 사랑을 잃게 되자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독하고 섬세한 감성이 그를 자살이라는 극한으로 몰고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 속에서 그의 시적 상상력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한다. 이때 탄생된 시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여성들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그녀의 죽음은 오히려 그를 신화로 만들었다.

이은정 교수(국어국문학 전공)는 “극중 수아는 실비아 플라스의 사랑과 광기·집착·극단적 죽음을 숭배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춘기 소녀들에게 「실비아 플라스 시집」은 순수한 텍스트적 의미 외에도 하나의 상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사랑을 이룰 수 없어 죽음을 택한 실비아 플라스. 그녀의 시집은 이 영화에서 수아와 우진의 순수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죽음을 암시하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추억’에 관한 소묘

: 영화 <러브레터>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상황 전개를 이해 할 수 없어서. OST의 감미로움이 지워지지 않아서. 여러가지 이유로 영화 <러브레터>는 한사람에게 두 번, 세 번… 열 번까지 재생되곤 한다. 영화 속에는 깨끗한 화면과 서정성을 극대화 한 스토리, 그리고 철학적 상징이 자리하고 있다.

똑같이 생긴 여자아이를 소재로 한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러브레터>는 시간에 얽힌 이야기다. ‘다른 곳에 사는 같은 얼굴의 두 여자’와 ‘같은 시공간·같은 이름의 얼굴이 다른 남녀’의 영화 속 이야기를 축으로 과거라는 시간을 회상하고 있다. 모든 갈등의 시작은 여자 주인공 히로코가 산에서 조난당한 연인 이츠키(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그 편지는 이츠키의 동명 동창인 또 다른 이츠키(여)에게 전달되고 그 여인은 단순히 동창이 아닌 이츠키(남)의 짝사랑 상대였다. 영화에서 히로코는 연인의 아련한 추억을 대신 찾아주는 중간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러브레터>는 추억과 시간, 과거를 말해주는 상징적 코드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중 이츠키(남)가 남들이 읽지 않은 책만을 골라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도서실 에피소드는 영화의 중요한 설정.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이츠키(여)는 책 뒷면에 그려진 자신의 초상을 보게 되고 이츠키(남)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확인한다. 결국 이츠키가 대출카드에 남겨놓은 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이츠키를 향한 사랑이었다.

여기서 클로즈업 돼 등장하는 책이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이 책은 ‘수면제’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난해하고 복잡해 영화와의 상관관계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과거의 시간이란 측면에서 이 둘은 교집합을 이룬다. 영화는 학창시절·눈·겨울·편지 등 너무도 아련하여 붙들고 싶은 추억과 과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역시 주인공 마르셀을 통해 콩브레 마을에서의 추억을 회고한다. 이는 다름 아닌 마르셀 프루스트의 추억이자 기억이다. 휴가 때마다 방문한 고모의 마을 집. 그곳에서 맺어진 인연을 무려 13년 동안 11권에 걸쳐 펴냈다고 하니 젊은 시절 그곳에 대한 추억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케 한다.

작품 속 화자인 마르셀은 “모든 사물과 존재는 시간에 의해 파괴되지만 과거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기억은 인간의 의식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가 어떤 사물에 의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마치 <러브레터>에서 자전거·편지·책·학교 등을 통해 이츠키(여)가 동명의 이츠키(남)를 회상하고, 히로코가 연인이었던 이츠키(남)의 과거를 찾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와 소설 속에 농축된 ‘연애의 법칙’

: 영화 <유브 갓 메일>과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한국에 <접속>이 있다면 헐리우드에는 <유브 갓 메일>이 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이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유브 갓 메일>은 당시 채팅이라는 신선한 소재로 호평을 받았다.

대형서점 ‘폭스 북스’를 경영하며 기업규모의 물량공세를 펼치는 죠 폭스는 소규모 아동전문서점을 운영하는 케슬린 켈리에게 불청객일 수밖에 없다. 서점이 하나의 사업체일 뿐이었던 죠와는 달리 케슬린에게 서점은 부모님의 유산이자 꿈이기 때문이다. 달갑지 않은 대형서점의 출현으로 우울해 하던 케슬린은 채팅에서 만난 상대에게 속상한 마음을 내비친다. 그 채팅상대는 다름 아닌 대형서점의 주인 죠였고 그녀에 대해 이미 사랑을 느끼고 있던 그는 갈등에 빠지게 된다.

이는 흥미롭게도 영화 속에서 케슬린이 즐겨 읽는 소설 「오만과 편견」을 닮아 있다. 대형서점과 소형서점이라는 대조적인 권력관계와 앙숙인 남녀사이는 연애소설의 고전이라 불리는 「오만과 편견」 속 마크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베넷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수작 「오만과 편견」은 귀족가문에 모든 것을 갖춘 듯한 다아시와 평범한 가문에 발랄하고 아름다운 베넷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다아시는 장점이 많은 청년이지만 오만한 성격 탓에 주변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베넷을 향한 사랑 역시 그녀 주변의 수준 낮은 인물들 때문에 망설인다. 결국 그의 사랑은 그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편견에 빠진 베넷은 그를 오만하다고 여기게 된다. 「유브 갓 메일」의 케슬린이 죠를 제대로 만나보지도 않고 악덕한 사람이라 평가하는 것은 베넷과 다르지 않다. 케슬린이 싫어하는 대형서점의 사장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에게 마음을 보여주지 못하는 죠 또한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다아시와 베넷이 서로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상대의 가족을 이해하고 오만한 성격을 고치듯, 케슬린과 죠 역시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사건들을 해결하려 애쓴다. 또 그 과정에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 중심엔 ‘이해’라는 중요한 다리가 놓여 있다. 즉 작품 속 주인공들은 진실과 이해를 통해 사랑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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