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옥

 26기, KBS 보도본부 기자

 1980년 5월 17일 오후3시, 학보사 안에서는 편집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회의가 식당에서 열리고 있었다. 지극히 평온했지만 어떤 예감이 드는 오후였다. 그때 갑자기 「퍽!」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단말마닽은 비명이 이어지고 유리창깨지는 소리, 『야! 놓치면 안돼, 잡아』하는 아우성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올 것이 온것이었다.

 십여명의 학보사식구들은 직감으로 군이 학교안으로 들어왔음을 알았다. 그때 우리는 지금도 있는 학보사소퍼의 시트카바를 뜯어 학보사에 있는 수많은 자료를 숨기기 시작했다. 웬만한 것들은 쓰게기통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학보사의 문을 잠갔다. 너무도 무기력한 심정으로 우린 그냥 않아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우리의 가슴을 죄게한 몇 번의 전화벨, 얼마후 저벅저벅하는 소리와 함께 학보사문은 강제로 열려졌다. 겁에 질린 수위아저씨 뒤로 군화발이 보였다.

 줄줄이 엮어져 가정관앞으로 나오자 외신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졌고, 우린 버스에 나뉘어 태워졌다. 먼저 버스에 탄 친구들이 노래를 불렀지만, 난 그걸보고 나의 이념과, 무책임한 행동, 비굴한 이상주의을 경멸했고 많은 것과 작별했다.

 열병을 치른 후 2학기. 당시 각 면 부장과 편집장이 모였을 때 『과연 학보를 낼 필요가 있는가?』회의가 앞섰다. 아닌게 아니라 아래학년은 이러한 사오항에서 학보를 내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집단 사퇴를 했다. 우리기의 의견도 엇갈렸다.

 그러나 나는 무슨일이 있어도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극히 패배주의적 발상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두운 현실에서 명분을 찾고 주저 앉아버리는 일은 쉽다고 생각했다. 온갖 구호와 열렬한 외침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고, 어떤 책임을 졌나? 지난 5월 나는 아무것도 못하지 않았는가? 명예를 얻기위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도 의미는 있다.

 명분을 위해 그 자리를 물러나는 것도 뜻은 있다. 그러나 당시, 나는 답답하고 힘든 상황에서 견디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악조건에도 자리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학보를 만들 후배를 위해서, 이 시대에 누군가는 뒤처리를 하고, 떳떳치 못한 우리의 처신에 조그마한 성의는 다해사 한다고 생가가했다. 몇주쯤 학보가 안나오면 어떠냐고 내 스스로에게 반문도 했다. 그 자체로도 우리의 의사표시가 아니냐고 수차례 되묻기도 했다.

 하지만 남이 알아주는 명분은 아니지만, 어려운 가운데 상황을 주시하고 지킨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없다. KBS보도본부에 들어와 5공시절을 보냈고 이대학보시절 못쟎게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어둡고 힘든 시절, 남들은 비겁하다고 보는 눈길과 싸우며 지키는 것, 견디는 것은 더 큰 용기라고 생각했다.

 책임질 수 없는 이념, 감당할 수 없는 행동은 우리 목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학보사의 3년을 가슴 아프게 떠올린다. 그러나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결코 차선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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