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하

 16기․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부회장

 70년 벽두 4학년때로 기억된다. 총학생회에서는 박정권의 3선개헌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연단에 프랭카드를 걸고 스탠드에 주욱 둘러않아 「총학」의 입장을 들었을 터였다. 구호나 노래는 없었고 박수는 쳤을 듯 싶다. 이것이 우리 재학중 기억에 남는 유일무이한 집회였다.

 그후 행동에 옮긴 것은 흰색 생의에 검정색 치마를 입는 것으로 개헌반대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정도였으며, 이는 곧 전교생의 말없는 호응으로 인해 확산일로로 치달아 적잖이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 타대학의 데모에 우리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70년, 유신독제를 음모하는 군사독제정권을 발칵 뒤집어놓은 평화시장 전태일씨의 분신조차도 80년 전통의 이화교정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다만 모두들 갑갑함과 「이대앞」이라는 사치의 대명사가 된 즐비한 옷가게들이 부끄럽고 뭔가 『이게 아니데…』싶은 막연한 부정속에서도 그럭저럭 무지와 안일로 보내던 학창시절이었다.

 졸업한지 18년, 세월과 더불어 이제야 「이게 아닌데」라는 막막함에서 「비로 이것이구나」라는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 우쭐거리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족(남편 장기표)의 투옥․수배등을 겪으면서 얻게 된 귀중한 깨달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렇듯 결국은 전국민이 알게 모르게 분단논리를 앞세운 독재정권의 볼모가 되어 있음을 알았고, 때문에 나는 이사회, 국가의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것인가를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그후 80년 중반(정확히 85년 12월 12일)에, 남보다 조금 먼저 이런피해를 경험한 당사자들이 모여 「민주화 실천가족운동협의회」란 단체를 만들었고 나 또한 그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

 수많은 회원 어머님들 역시 자식들의 문제로부터 시작해 점차 사회문제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미침내 당신들 스스로의 실천이 아니고서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 그후 어머님들이 해내신 일들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어머니들의 항의와 농성은 같힌 사람들에 있어서는 곧 구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30년, 40년의 징역으로도 아직 세상빛을 보지못한 250여명의 장기수들에 대한 애잔한 관심, 20년 징역과 다시 보안감호 15년만에 석방되는 청주보안감호소의 피감호자 여러분들. 이 모두 민가협 어머니들의, 가족의 뜨거운 호소의 열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5공보다 훨씬 많은 구속자가 양산된 6공화국. 그러나 사회안전법이 제정된 75년 이래 128명의 보안 감호자들이 수감돼 왔던 청주감호소의 폐쇄. 37천 장기형을 살고 만기출소하는 분이 사회안전법의 폐지로 감호소행 대신 석방되는 것을 보면 분명 길고 오랜 우리의 싸움도 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으레히 마감직전에야 급히 원고지를 메꾸고 아쉬움으로 원고를 넘기던 그 시절과 요즈음 세대의 사고․판단․행동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없을 수 없고, 한편으로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부러움과 흐뭇함을 감출 수 없음을 고백한다. 아우러 후배들에게 「장기복역양심수」들에 대한 관심을 부탁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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